궁핍한 시대의 징후와 표상에 대하여
2021년 01월 18일(월) 08:00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새해맞이의 감흥 대신, 다 써 버린 시간 위에 슬쩍 새로운 숫자를 표기하는 것 같은 이 기시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것처럼.

새 시작은 끝이 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가 행하는 무엇인가를 일 혹은 경험,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삶이라고 말한다. 이 ‘무엇들’이 함부로 엉클어지거나 앞뒤가 바뀌는 일이 없도록 정리하고 분류하는 형식과 방법이 곧 시간이라는 단위다. 어제·오늘·내일로 나누고 지난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 등등,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낡은 시간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은 새로운 출발과 이전 사건들의 선명한 끝맺음이 없는 것에서 온다. 이 시간의 기시감은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표상과 징후들을 통해서 절박한 궁핍감으로 되돌아온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모든 것은 반복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그대로 계속되면서 내일은 사라진 단어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복의 반복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수단이 ‘변신 놀이’다. 변하지 않았고 애초에 생각조차 없었지만, 달라진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변신 놀이는 카프카의 그 유명한 ‘변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카프카의 변신은 자본의 구조화된 권력 앞에서 벌레와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의 의미를 묻는다.

반면에 우리가 목격하는 변신 놀이는 환상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서 시간에 역행하며 그 이득으로 권력을 얻는다. 그래서 같은 소리, 같은 얼굴, 같은 몸짓은 반복된다. 그 반복을 허용하는 관객의 모습도 반복된다. 연예인이 국민의 역사 교육을 담당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스스로 법이 되어서 또 다른 제국을 건설하고, 정치가들은 누가 몇 번이나 연예 프로에 나왔는지를 따져 보는 사이에 학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점치는 예언자 놀이를 한다. 자, 이제 우리의 시간이 어떤 모습인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반복적 행동이 일어나는 밑바닥에는 정형화된 일정한 정서가 작용한다. 우리가 어떤 정서에 자주 휩쓸리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끌림과 홀림이라는, 일상적이지만 사실은 특별한 정서다. 이 두 정서는 본질에서 맹목적이고 충동적이다. 끌림은 의지와 판단 이전에 이미 마음의 움직임이 지배하는 상태다. 그에 비해 홀림은 대상에 사로잡힌 상태의 감정이다.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뒤틀린 현상들의 배후를 설명하는 정서를 읽을 수 있다. 끌림과 홀림은 권력의 생산과 확장에 가장 좋은 수단이자 전략인 것이다.

물론 끌림은 아주 특별한 정서로 친밀한 관계 맺기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생산적인 조건이어서 끌림이 없이는 서로에게 가까워지기도 어렵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끌림의 정서는 합리적 인식과 판단 없이 맹신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끌림의 본질에 대해서 스피노자(1632~1677)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끌림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끌림이 주는 기쁨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참된 기쁨은 오직 사랑이라는 필연에서 나오는 것으로, 성장과 변화의 힘이 된다. 그래서 끌림이 주는 기쁨은 ‘유사 기쁨’으로 대리의 감정이며 심지어 매매와 전이도 가능하다. 홀림의 정서 또한 끌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홀림은 ‘홀리다’에서 나온 것이니, 유혹하거나 당한 정신의 포획과 복종을 말하는 정서다.

이런 끌림과 홀림이 공적·사회적 영역에서 거침없이 박수를 받을 때, 제자리를 이탈하고 나선 것들이 힘과 영향력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새해의 시간이 본성에 맞게 흐르는 방법은 하나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 정말 사라지고, 살아 있어야 할 것들이 살아서 성장하고, 마땅히 시작되어야 할 것들을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 올라브 하우게의 시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 시 속의 그들은 무지의 폭력성을 말하는 것이니, 국회 대신에 우리의 시간이 가야 하는 길을 막아서는 모든 것의 이름을 써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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