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나의 애송시.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2021년 01월 07일(목) 17:12
먹고 싶다…… /허수경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굴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조차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한 사람에게 가장 눈부시고 동시에 가장 아렸던 인생의 한 시기를 기록할 수 있는 시가 있다면 내게는 바로 이 시다. 이 시의 여백에 2018년 10월 4일에 적어두었던 일기와도 같은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어제 저녁 7시 50분 당신이 떠났다. 세상에나. 나는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충격에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시들을 읽었다. 이 시집 곳곳에 20대의 나의 눈물이 스며들어 세월을 이겨내었는데. 당신은 살아 있어야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출간한 그 해 독일로 떠나 고대 근동고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틈틈이 모국어로 시를 썼던 시인의 죽음은 이미 지나가버린 나의 젊은 날을 서럽게 떠올리게 했다.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소망한 시인이었다.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중 정확히 44쪽에서 제본용 접착제가 갈라져 자연스럽게 이 시가 펼쳐질 만큼 이 시와 시인에게 나의 젊은 날은 기대어 있었다.

1994년 3월 25일, 26살의 나는 이 시를 처음 읽고 시 속의 화자처럼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서 울었다. 학교를 벗어나 맞닥뜨린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데다 심지어 어떤 삶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하루하루 젊음을 까먹으며 헤매던 나날이었다. 귀가하는 직장인들과 놀러 나온 연인들로 붐비는 광화문 사거리를 인파에 떠밀리며 홀로 걸을 때면 힘겨움과 외로움에 무거운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몸을 가졌지만 삶은 왜 그다지도 보잘 것 없는 월급과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일자리로 초라했던지. 비참한 기분이 들 때면 이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비루한 존재들을 사랑한 시인도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를 중얼거리며 울었다지 않았는가.

세월이 훌쩍 흘러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구매했던 사회과학전문서점 ‘오늘의책’도 문을 닫았고, 시집을 권유했던 사람과의 연락도 끊어졌고, 약자에게 아부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시인도 독일 뮌스터의 흙이 되었다. 이제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조금은 알 나이가 되었지만 약자에게 특히 가혹한 세상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당신, 한 걸음조차 떼기 힘겨울 때 불안하고 버거운 나날을 기댈 수 있는 시를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김동숙/ 소설낭독고양이’를 이끌며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 서울 출생, 서울시립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201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매미 울음소리>로 등단. 소설집 『짙은 회색의 새 이름을 천천히』(푸른사상, 2019)를 출간했다. 2019년 경기문화재단 문학창작집 출간지원 소설집 『짙은 회색의 새 이름을 천천히』 선정, 2020년 제2회 영축문학상 단편소설 <눈부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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