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 유감
2020년 10월 21일(수) 00:00 가가
퇴근을 위해 주차된 차로 가서 스마트키를 눌렀더니 아무 반응이 없다. 아마도 배터리가 닳은 모양이다. 비상 시동을 걸어 귀가한 후 마트에서 배터리를 사서 갈아 끼웠다. 이제는 잘 되겠지. 어라? 차문을 개폐하는 경쾌한 신호음은 여전히 없다. 솜씨 없는 주인과 10년 넘게 함께한지라 내상(內傷)이 만만치 않을 터, 필시 차의 감지기에 이상이 온 게 분명하겠다. 다음날 정비소에 들르니 산뜻한 청년이 살갑게 맞아 준다. “배터리를 갈았는데도 차가 반응이 없네요. 차가 나이를 먹으니 귀까지 먹었나 봐요.”
시답잖은 농담에도 내색 않고 스마트키를 분해한 젊은이가 한마디 한다. “배터리를 거꾸로 끼우셨네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은 누구 책임일까? 속담에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고 했는데, 오랜 정분(情分)을 팽개친 채 과오는 모르쇠 잡고 차에만 문제를 떠맡겼다. 가을빛이 이제 풍요로운 열매 속으로 쌓이는 때인데, 세상을 향한 지혜보다는 쓸 데없는 확증편향이나 고벽(痼癖)만 세월의 더께로 자리를 잡았다.
문득 옛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새로 부임한 원님이 고을에 효자가 있다 하여 찾아갔더니, 80세 노모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발을 씻기고 있는 게 아닌가. ‘효자라더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분노한 원님이 효자를 잡아들여 문초했더니 효자의 말인즉, “원님,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겉으로 효자인 척하며, 남 안보는 데서는 발을 맡겼을까. 세간의 호평(好評)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니, 노모의 표정만 확인했어도 상황 인식을 달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효행의 방식이 하나만은 아닐 텐데 ‘다름’과 ‘틀림’을 구분 못하고 질책했으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한 격이다.
이렇듯 다른 것조차 틀리다고 규정해 버리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수렁은 생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일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들 여럿의 한가로운 대화 속에 미국 대통령 링컨이 끼어들었다.
링컨이 변호사로 일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유사한 사건 두 개를 동시에 변호하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두 사건과 관련된 법 조항과 판사가 동일했다. 오전 재판에 변호인으로 참석한 링컨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 끝에 피고인의 승소를 받아 내었다. 두 번째 재판은 오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열의를 다해 원고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판사가 물었다. “왜 오전과 생각이 달라졌지요?”
링컨은 대답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오전엔 제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지금 제 판단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꺼낸 벗의 의도는 이랬다. 경직된 사고에 얽매이면 진실을 보지 못하는 법. 일반화된 논리를 따르지 않고 개별 사례에 담긴 상황의 차이를 읽어 내는 노력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창한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링컨 그 친구, 안되겠네!”라는 한 우인(友人)의 단언에 좌중은 순간 썰렁해졌다. 확실한 가치관도, 진실에 대한 존중도 없이 법률 지식을 악용하여 미꾸라지처럼 정의를 휘돌리는 ‘법꾸라지’(法+미꾸라지)라는 추가 언급은 순간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오전과 오후의 사건 전모를 차치하고서 섣불리 링컨의 행동을 가치 판단할 수 있을까. 두 사건 모두 약자의 입장을 대변했을 개연성 또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 확신은 잠시 접어 두고, 정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물론 가벼운 담소 자리에서 따질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취기 탓일까. 갑자기 진영 논리 속에서 ‘누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누가 더 나쁜가’로 비약하며 끝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필 배터리가 새것이라는 사실에 매몰되었던 이는 바람 끝의 서늘함을 저어할 뿐이었다.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은 누구 책임일까? 속담에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고 했는데, 오랜 정분(情分)을 팽개친 채 과오는 모르쇠 잡고 차에만 문제를 떠맡겼다. 가을빛이 이제 풍요로운 열매 속으로 쌓이는 때인데, 세상을 향한 지혜보다는 쓸 데없는 확증편향이나 고벽(痼癖)만 세월의 더께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다른 것조차 틀리다고 규정해 버리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수렁은 생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일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들 여럿의 한가로운 대화 속에 미국 대통령 링컨이 끼어들었다.
링컨이 변호사로 일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유사한 사건 두 개를 동시에 변호하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두 사건과 관련된 법 조항과 판사가 동일했다. 오전 재판에 변호인으로 참석한 링컨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 끝에 피고인의 승소를 받아 내었다. 두 번째 재판은 오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열의를 다해 원고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판사가 물었다. “왜 오전과 생각이 달라졌지요?”
링컨은 대답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오전엔 제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지금 제 판단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꺼낸 벗의 의도는 이랬다. 경직된 사고에 얽매이면 진실을 보지 못하는 법. 일반화된 논리를 따르지 않고 개별 사례에 담긴 상황의 차이를 읽어 내는 노력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창한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링컨 그 친구, 안되겠네!”라는 한 우인(友人)의 단언에 좌중은 순간 썰렁해졌다. 확실한 가치관도, 진실에 대한 존중도 없이 법률 지식을 악용하여 미꾸라지처럼 정의를 휘돌리는 ‘법꾸라지’(法+미꾸라지)라는 추가 언급은 순간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오전과 오후의 사건 전모를 차치하고서 섣불리 링컨의 행동을 가치 판단할 수 있을까. 두 사건 모두 약자의 입장을 대변했을 개연성 또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 확신은 잠시 접어 두고, 정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물론 가벼운 담소 자리에서 따질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취기 탓일까. 갑자기 진영 논리 속에서 ‘누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누가 더 나쁜가’로 비약하며 끝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필 배터리가 새것이라는 사실에 매몰되었던 이는 바람 끝의 서늘함을 저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