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를 보며
2020년 08월 26일(수) 00:00

옥영석 자활기업지원센터 자문위원

십여 년 전 일이다. 좋은 학교를 나와 유수한 부서를 거쳐 승진 대상이 된 한 선배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주도면밀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후엔 호쾌하게 술자리를 주도하며 상사들은 형님, 후배들은 아우로 삼으니 언제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상사들은 그를 능력있고 카리스마 있는 직원으로 여겼지만, 매사에 주도적이다 보니 다소 독선적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말 인사에서 그는 고배를 마셨다. 직장 생활이 많은 급여나 좋은 환경보다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던 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술에 절어 지냈고, 상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인사마저 하려 들지 않았다.

상심한 그에게 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부장님의 따뜻한 위로를 기대했다. 안타깝지만 내년을 기대해보자며 술잔이 몇 번 돌다 보면, 마무리되는 게 대강의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장님은 “어려울 때에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며 크게 꾸짖고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부서 공기는 더 싸늘하게 식어갔고, 당사자들이야 그렇다지만 그 사이에서 힘들었던 직원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지난주엔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세한도가 큰 화제였다. 추사 김정희의 걸작이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국보가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된 것이다.

몇 해 전 어쩌다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 마주해 본 나는 신산했던 대가의 말년이며 글과 그림에 대한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절제와 생략으로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선비의 기개와 의지를 그려낸 세한도를 보는 순간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증조부가 영조의 부마였으며 아버지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그는 동지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후 병조참판까지 지냈으나 정쟁에 휘말려 갖은 고문을 당하고 제주에 유배를 가게 된다. 오십 중반에 감당해야 했던 고문, 절해고도의 끝에서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형벌은 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제주까지 건너가 수발을 든 이가 소치 허련이었고, 연경에 갈 때마다 서적을 구해다 준 제자가 역관 이상적이었다. 권좌에서 밀려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스승에게 변치 않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그는 유배지의 곤궁한 처지에 종이 세 장을 덧붙인 다음,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보낸다.

그림이 중앙박물관까지 오게 된 사연도 극적이다. 제자에게 그려준 세한도는 일제말 민영휘의 손을 거쳐, 청조학 연구에 몰두하던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치카시의 소유가 되어 일본으로 넘어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미군의 공습이 한창이던 동경으로 건너가 100일 동안이나 문안을 하며 그림을 넘겨 달라 간청했다. 청조학 연구의 1인자가 추사였음을 알았던 치카시는 결국 돈 한 푼 받지 않고 세한도를 넘겨주었고, 이후 개성 출신 실업가인 손세기, 손창근 부자의 손을 거쳐 중앙박물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알고 넘겨준 치카시 교수나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한 손창근 선생의 도량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치카시의 아들 또한 나머지 일만 오천여 점이 넘는 자료를 2006년에 기증하여 과천 추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니, 부자의 대를 잇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나저나 10년 전 부장님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헷갈린다. 소나무만으로는 숲이 우거질 수 없을 터, 나머진 다 잘라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도 내 그릇이 작은 것인지, 수양이 부족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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