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한 석실묘
2020년 07월 22일(수) 00:00 가가
석실이 옹관 대체한 까닭은 ‘가족들 한 공간에 안치’ 때문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馬 韓
지난 글 <12>와 <13>에서는 마한의 분구묘와 옹관묘를 다루었다. 분구묘는 하나의 분구 안에 여러 개의 목관, 옹관, 석실을 사용하여 가족들을 함께 묻은 것인데, 거대한 옹관이 영산강유역에서 성행하였던 이유는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된 것이다.
마한의 석실묘는 옹관묘를 대체한 것인데 하나의 석실묘가 그 자체로 가족묘가 되기도 하였다. 마한의 석실묘는 어떻게 시작되어 왜 끝나게 되었을까?
◇생사관의 변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민묘는 깊은 토광을 파서 시신을 묻고 흙을 덮는 것으로서 전세계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한사람을 묻기 위한 것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사람의 영혼이 혼(魂)과 백(魄)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혼백은 생전에는 조화를 이루다가 사후에는 분리되어 혼은 불멸의 세계로 승천하고 백은 육체에 남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혼을 위해서는 집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백을 위해서는 무덤에 일상용기와 음식물을 부장해 주는 것으로 끝냈다. 더구나 죽은 이의 환생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은 시신과 함께 지하 깊숙이 밀폐되었다.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상나라 왕들의 거대한 무덤들이 깊은 지하에 만들어지고 그 위치조차 알 수 없는 평묘로 마무리된 것은 바로 그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와같은 생사관은 전국시대에 바뀌기 시작하였다. 죽은 이의 혼이 돌아온다는 관념에서 귀혼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한편 분묘제사가 시작되었다. 제후들의 무덤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거대한 봉분을 갖기 시작하였고 부부는 하나의 봉분을 공유하기 시작하였다. 진시황릉은 거대한 봉분이 조성되었던 대표적인 예이며 본격적인 분묘제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장원 경제가 발전하였던 한나라 때는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부부 중심의 가족공동체가 중시되면서 부부는 같은 공간에 묻히게 되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분묘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행하였다.
◇석실묘의 기원과 확산
한나라 때는 시간차를 두고 사망한 부부를 함께 묻기 위해 출입문이 설치된 목실(木室)이 탄생하였다. 황토지대인 중원지역에서는 벽돌을 구워 전실(塼室)로 발전시켰고, 돌이 많은 동북지역에서는 석실(石室)을 만들었다.
석실은 3세기에 고구려 적석총에 도입되었으며 4세기에는 백제, 5세기에는 가야, 6세기에는 신라에 파급되었다. 6세기의 무령왕릉은 백제 석실 대신 중국 전실을 수용한 것이다.
같은 석실이라 하더라도 지하 석실과 지상 석실은 계통적으로 차이가 있다. 지하 석실은 목실에서 전실을 거쳐 변화한 것이지만 지상 석실은 중국 강남지역에서 춘추시대에 시작되어 산동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마한 석실, 가야 석실 일부, 일본 북부 규슈 석실들이 지상 석실이다. 고구려 석실도 지상에 위치하지만 적석총 자체가 원래 지상 석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통을 이은 것이다.
◇마한 석실묘와 백제 석실묘
마한 석실은 5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지상 석실이라는 점에서 백제의 지하 석실과 계통적으로 구분된다. 마한 석실묘가 사용된 곳은 고창을 포함한 광주·전남 지역의 마지막 마한 제국이다. 경기·충청·전북 지역의 마한 제국은 석실묘를 채택하기 전에 백제에 병합되었으며 병합된 뒤에는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었다.
과거에는 마한 석실묘를 백제 석실묘로 잘못 알고 광주·전남지역 초기 석실묘부터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남긴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주 복암리 3호분의 초기 석실에서 4개의 옹관이 나온 바와 같이 그 주인공은 토착 마한 세력자이다.
마한 석실묘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5세기말 백제 석실이 파급되면서 지하 석실이 시작되었지만 기존의 지상 석실은 중단되지 않았다.
◇마한 석실묘의 성행 배경
마한 석실묘는 석실이 지상 분구에 위치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가야, 중국 강남·산동, 일본 북부 규슈지역 석실묘와 상통하지만 구조적으로, 시기적으로, 출토유물에 있어 북부 규슈 석실묘와 더 가깝다.
마한 석실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들 지상 석실묘를 망라하여 거시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글 <13>에서는 마한, 중국, 일본, 베트남의 성인용 옹관묘들이 바다를 사이에 둔 서로 비슷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시간차를 두고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았는데 석실묘들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광주·전남지역 마한 사회에서 석실이 옹관을 대체한 것은 가족 구성원들을 같은 공간에 함께 안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개의 옹관이 공존하는 나주 복암리 3호분 석실, 5인이 안치되었던 함평 월계리 석계 ‘91-6호 석실 등은 부부 합장 위주인 다른 지역 석실과 달리 가족묘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석실의 축조에 있어서는 옹관 제작 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는 경제 발전에 따라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심지였던 나주 반남지역보다는 나주 다시지역이나 영암, 함평 등 주변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중심지역은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묘제 변화가 늦은 것이다.
우리의 석실묘는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까지 널리 사용되다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중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가족 납골묘가 사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다만 이곳저곳에 거대한 석제 납골당을 기념탑처럼 축조하는 것은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 가족 납골묘를 만들더라도 마한 석실묘 처럼 분구를 씌우고 필요할 때만 출입구를 노출시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지난 글 <12>와 <13>에서는 마한의 분구묘와 옹관묘를 다루었다. 분구묘는 하나의 분구 안에 여러 개의 목관, 옹관, 석실을 사용하여 가족들을 함께 묻은 것인데, 거대한 옹관이 영산강유역에서 성행하였던 이유는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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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한 목곽묘(강소성 양주시 한광릉박물관, 2005년) |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민묘는 깊은 토광을 파서 시신을 묻고 흙을 덮는 것으로서 전세계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한사람을 묻기 위한 것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사람의 영혼이 혼(魂)과 백(魄)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혼백은 생전에는 조화를 이루다가 사후에는 분리되어 혼은 불멸의 세계로 승천하고 백은 육체에 남는다고 보았다.
장원 경제가 발전하였던 한나라 때는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부부 중심의 가족공동체가 중시되면서 부부는 같은 공간에 묻히게 되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분묘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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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육조 전실묘(강소성 진강시, 2005년) |
한나라 때는 시간차를 두고 사망한 부부를 함께 묻기 위해 출입문이 설치된 목실(木室)이 탄생하였다. 황토지대인 중원지역에서는 벽돌을 구워 전실(塼室)로 발전시켰고, 돌이 많은 동북지역에서는 석실(石室)을 만들었다.
석실은 3세기에 고구려 적석총에 도입되었으며 4세기에는 백제, 5세기에는 가야, 6세기에는 신라에 파급되었다. 6세기의 무령왕릉은 백제 석실 대신 중국 전실을 수용한 것이다.
같은 석실이라 하더라도 지하 석실과 지상 석실은 계통적으로 차이가 있다. 지하 석실은 목실에서 전실을 거쳐 변화한 것이지만 지상 석실은 중국 강남지역에서 춘추시대에 시작되어 산동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마한 석실, 가야 석실 일부, 일본 북부 규슈 석실들이 지상 석실이다. 고구려 석실도 지상에 위치하지만 적석총 자체가 원래 지상 석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통을 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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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상 석실묘(구마모토현 오부산고분, 2013년) |
마한 석실은 5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지상 석실이라는 점에서 백제의 지하 석실과 계통적으로 구분된다. 마한 석실묘가 사용된 곳은 고창을 포함한 광주·전남 지역의 마지막 마한 제국이다. 경기·충청·전북 지역의 마한 제국은 석실묘를 채택하기 전에 백제에 병합되었으며 병합된 뒤에는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었다.
과거에는 마한 석실묘를 백제 석실묘로 잘못 알고 광주·전남지역 초기 석실묘부터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남긴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주 복암리 3호분의 초기 석실에서 4개의 옹관이 나온 바와 같이 그 주인공은 토착 마한 세력자이다.
마한 석실묘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5세기말 백제 석실이 파급되면서 지하 석실이 시작되었지만 기존의 지상 석실은 중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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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상 석실묘(강소성 연운항시, 2020년) |
마한 석실묘는 석실이 지상 분구에 위치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가야, 중국 강남·산동, 일본 북부 규슈지역 석실묘와 상통하지만 구조적으로, 시기적으로, 출토유물에 있어 북부 규슈 석실묘와 더 가깝다.
마한 석실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들 지상 석실묘를 망라하여 거시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글 <13>에서는 마한, 중국, 일본, 베트남의 성인용 옹관묘들이 바다를 사이에 둔 서로 비슷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시간차를 두고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았는데 석실묘들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광주·전남지역 마한 사회에서 석실이 옹관을 대체한 것은 가족 구성원들을 같은 공간에 함께 안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개의 옹관이 공존하는 나주 복암리 3호분 석실, 5인이 안치되었던 함평 월계리 석계 ‘91-6호 석실 등은 부부 합장 위주인 다른 지역 석실과 달리 가족묘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석실의 축조에 있어서는 옹관 제작 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는 경제 발전에 따라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심지였던 나주 반남지역보다는 나주 다시지역이나 영암, 함평 등 주변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중심지역은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묘제 변화가 늦은 것이다.
우리의 석실묘는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까지 널리 사용되다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중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가족 납골묘가 사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다만 이곳저곳에 거대한 석제 납골당을 기념탑처럼 축조하는 것은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 가족 납골묘를 만들더라도 마한 석실묘 처럼 분구를 씌우고 필요할 때만 출입구를 노출시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