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편집’
2020년 04월 03일(금) 00:00
신문에서 ‘편집’은 뉴스의 크기를 조정하고 기사에 제목을 붙여 지면을 구성하는 일이다. 신문은 매일 발행된다. 편집부는 둥그런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보를 사각의 지면에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해 고민하고, 적확한 제목과 개성 있는 지면 창출을 위해 매일 분투한다. 독자의 이해와 편의를 위해서다.

밤늦은 시간. 내일 아침을 준비하는 그들이 가끔은 스스로 작업을 내려놓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백지 편집’이라는 파격이다. 소중한 지면에 기사·제목·사진을 채우지 않고 모두 ‘비움’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한국일보는 2000년 1월 1일 1면을 하얗게 비워 놓았다. ‘새천년이 도래한 일보다 비중 있는 뉴스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문은 2016년 6월 22일자 1면을 백지로 편집했다. 박근혜 정부의 영남권 신공항 건설 백지화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백지 편집’은 신문의 기능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사건을 이슈화하는 데는 큰 효과가 있다.

최근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농구·야구·골프 등 스포츠 경기가 취소되자 텍사스의 한 지역 일간지가 지난달 16일 스포츠 섹션의 1면을 백지로 편집했다. 편집장은 “그 어느 곳에서도, 단 한 게임도 열리지 않았다. 백지 편집은 코로나 확산을 한눈에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프로야구 개막은 기약이 없고 프로축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시즌 축소 운영을 논의하고 있다. 인적도 함성도 사라진 그라운드는 팬들을 슬프게 한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질 때의 긴장감, 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홈런이나 골 세리머니, 라이벌 팀을 무너뜨렸을 때의 짜릿함, 판정에 대한 불만과 패배에 대한 탄식까지….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지고 더할 수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승부의 시계가 멈추자 신문 스포츠면에 활력이 사라졌다. 공연과 전시가 멈춘 문화면도, 경기 침체의 수렁에 빠진 경제면도 마찬가지다. 지금 편집기자들의 머릿속은 하얗다. 차라리 ‘백지 편집’을 해 볼까?

/유제관 편집1부장 jk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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