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고자료로 밝혀진 통합시기
2020년 03월 11일(수) 00:00 가가
마지막 마한제국들이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530년경
백제 3단계에 걸쳐 마한 54국 통합
1단계, 3세기말 차령까지
2단계, 4세기중엽 노령까지
3단계, 6세기중엽 남해안까지
백제 3단계에 걸쳐 마한 54국 통합
1단계, 3세기말 차령까지
2단계, 4세기중엽 노령까지
3단계, 6세기중엽 남해안까지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5> 고고자료로 밝혀진 통합시기
지난 글 <4>에서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광주·전남지역의 마지막 마한제국들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를 369년으로 보았던 이병도 박사의 견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는 문헌자료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고자료를 이용하여 해결하여야 한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 건국 주도세력은 서울 강남지역에 정착한 다음 3단계에 걸쳐 마한제국들을 통합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3세기말 차령산맥까지, 4세기중엽 노령산맥까지, 6세기중엽 남해안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고대국가의 영역과 지배방식
광주·전남의 마지막 마한제국들이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은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왕 26년과 27년(서기 9년) 두 차례에 걸쳐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나올 뿐이다.
고대 사회는 영역의 의미가 근대국가와는 크게 달랐을 뿐만 아니라 잦은 정복전쟁으로 인해 수시로 변하였기 때문에 영역의 변화가 문헌기록에 정확하게 반영되기 어려웠다. 고구려와 신라는 비석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정복 활동 가운데에는 논란이 끊이지 않은 것도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다른 문헌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대국가의 영역에 대해서는 지배방식에 대한 일반론을 통해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지배방식은 직접지배와 간접지배로 구분된다. 세력권, 영향권 등은 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지배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을 가진 개별 세력 사이의 역학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영역 내부에서는 직접지배, 간접지배를 불문하고 조세가 징수되지만 세력권에서는 의무적 공납이, 영향권에서는 선택적 조공이 이루어진다. 공납이나 조공은 지배 방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흔히 광주·전남지역은 369년 이후 백제의 간접지배를 받았다고 하지만 6세기초까지는 백제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표현될 수 없다. 백제가 공납지배를 하였다고도 하지만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세력권 혹은 영향권 안에 두었다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특정 지역이 다른 국가의 영역으로 통합된 사실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병합 이전과 이후의 고고자료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거지나 토기류는 양은 풍부하지만 대부분 일상생활과 관련되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를 즉시 반영하기 어렵다. 성곽ㆍ고분ㆍ위세품 등 정치적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제 성곽은 어디에, 왜 축조되었는가
일반적으로 고대국가 성곽은 도성과 그 방어에 필요한 지역 외에는 대부분 인접국의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영역의 방어 뿐만 아니라 확장에 있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보루들이 서울 강북 아차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것은 서울 강남에 도읍하였던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국 475년에 백제를 웅진으로 천도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 광주·전남지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백제 성곽은 완주(배매산성)에 있으며 축조시기가 5세기 후반이다. 당시 이 지역이 백제와 마지막 마한제국 사이의 경계 지역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축조된 것이다.
광주·전남지역 성곽 가운데 백제 성곽이 처음 등장한 지역은 순천(검단산성), 여수(고락산상), 광양(마로산성) 등 동부지역이고 6세기 초에 해당한다. 그 위치가 섬진강 쪽이었던 이유는 마지막 남은 마한제국과 가야제국의 연계를 차단하는 동시에 양쪽을 함께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한 고분은 왜, 어떻게 변했는가
광주·전남지역에서는 분구묘들이 성행하였는데 초기에는 목관이 사용되다가 점차 옹관을 거쳐 영산강식 석실로 바뀌어 나갔다. 6세기초까지 40m 내외의 거대한 규모나 금동관과 같은 출토유물 등에서 백제 왕묘에 못지않은 면모를 갖추었다가 6세기 중엽부터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 축조되지 못하였다.
한때 영산강식 석실묘를 백제 석실묘로 보고 영산강식 석실묘가 등장하는 5세기 후반부터 백제 관리들이 파견되어 직접지배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영산강식 석실묘와 백제 석실묘는 석실의 위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에서 계통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백제 석실묘는 10~20m 규모에 불과하고 삼족토기와 같은 백제 토기가 부장된다. 6세기 중엽 백제에 통합되면서 기존 고분이 중지되고 백제 고분이 시작된 것이다. 4세기 중엽에 통합된 전북지역에서 더 이상 마한 고분들이 발전하지 못한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나주 금동관은 백제왕이 하사한 것인가
1917년 12월에 나주 신촌리 9호분 옹관에서 출토된 5세기말의 금동관은 백제왕이 지방 신하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지배자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신하에게 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된 국가의 왕이 영역 내부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은 신뢰와 영토 수호 임무를 의미하는 칼이다. 신라 영역 곳곳에서 출토되는 삼엽문 환두대도가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대통령이 장성들에게 직접 칼을 수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백제가 일본에 보낸 칠지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특정 지역 세력자에게 칼이 아닌 금동관이 제공되었다면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제공된 것이 아니다. 독자적 관계 속에서 상호 평화 공존과 협력 관계 유지를 위한 외교적 호의품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더구나 나주 금동관은 제작 기법과 양식적 특징이 백제와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백제에서 호의품으로 제공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백제에 편입되었는가
백제의 영역 확산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광주·전남지역의 성곽ㆍ고분ㆍ위세품(금동관) 등을 보면 이 지역 마한제국들이 6세기초까지 단절없는 성장을 계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말~6세기초에 성행하였던 40m 전후의 거대한 마한 고분들이 6세기 중엽경부터 소규모 백제 고분들로 바뀌는 것은 백제의 병합이 530년경에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와같은 새로운 견해는 기존 이병도 박사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는데 왜 이와 관련된 문헌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만약 그런 자료가 남아 있다면 이병도 박사의 견해는 당연히 그해 따랐을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5> 고고자료로 밝혀진 통합시기
지난 글 <4>에서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광주·전남지역의 마지막 마한제국들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를 369년으로 보았던 이병도 박사의 견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는 문헌자료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고자료를 이용하여 해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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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영역 |
광주·전남의 마지막 마한제국들이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은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왕 26년과 27년(서기 9년) 두 차례에 걸쳐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나올 뿐이다.
영역 내부에서는 직접지배, 간접지배를 불문하고 조세가 징수되지만 세력권에서는 의무적 공납이, 영향권에서는 선택적 조공이 이루어진다. 공납이나 조공은 지배 방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흔히 광주·전남지역은 369년 이후 백제의 간접지배를 받았다고 하지만 6세기초까지는 백제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표현될 수 없다. 백제가 공납지배를 하였다고도 하지만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세력권 혹은 영향권 안에 두었다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특정 지역이 다른 국가의 영역으로 통합된 사실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병합 이전과 이후의 고고자료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거지나 토기류는 양은 풍부하지만 대부분 일상생활과 관련되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를 즉시 반영하기 어렵다. 성곽ㆍ고분ㆍ위세품 등 정치적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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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출토 금동관(바깥쪽)과 금동상투관(안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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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견된 백제 칠지도. |
일반적으로 고대국가 성곽은 도성과 그 방어에 필요한 지역 외에는 대부분 인접국의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영역의 방어 뿐만 아니라 확장에 있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보루들이 서울 강북 아차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것은 서울 강남에 도읍하였던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국 475년에 백제를 웅진으로 천도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 광주·전남지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백제 성곽은 완주(배매산성)에 있으며 축조시기가 5세기 후반이다. 당시 이 지역이 백제와 마지막 마한제국 사이의 경계 지역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축조된 것이다.
광주·전남지역 성곽 가운데 백제 성곽이 처음 등장한 지역은 순천(검단산성), 여수(고락산상), 광양(마로산성) 등 동부지역이고 6세기 초에 해당한다. 그 위치가 섬진강 쪽이었던 이유는 마지막 남은 마한제국과 가야제국의 연계를 차단하는 동시에 양쪽을 함께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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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분구 중간에 위치한 영산강식 석실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 |
광주·전남지역에서는 분구묘들이 성행하였는데 초기에는 목관이 사용되다가 점차 옹관을 거쳐 영산강식 석실로 바뀌어 나갔다. 6세기초까지 40m 내외의 거대한 규모나 금동관과 같은 출토유물 등에서 백제 왕묘에 못지않은 면모를 갖추었다가 6세기 중엽부터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 축조되지 못하였다.
한때 영산강식 석실묘를 백제 석실묘로 보고 영산강식 석실묘가 등장하는 5세기 후반부터 백제 관리들이 파견되어 직접지배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영산강식 석실묘와 백제 석실묘는 석실의 위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에서 계통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백제 석실묘는 10~20m 규모에 불과하고 삼족토기와 같은 백제 토기가 부장된다. 6세기 중엽 백제에 통합되면서 기존 고분이 중지되고 백제 고분이 시작된 것이다. 4세기 중엽에 통합된 전북지역에서 더 이상 마한 고분들이 발전하지 못한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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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진급한 장성에게 칼을 수여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다. |
1917년 12월에 나주 신촌리 9호분 옹관에서 출토된 5세기말의 금동관은 백제왕이 지방 신하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지배자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신하에게 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된 국가의 왕이 영역 내부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은 신뢰와 영토 수호 임무를 의미하는 칼이다. 신라 영역 곳곳에서 출토되는 삼엽문 환두대도가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대통령이 장성들에게 직접 칼을 수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백제가 일본에 보낸 칠지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특정 지역 세력자에게 칼이 아닌 금동관이 제공되었다면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제공된 것이 아니다. 독자적 관계 속에서 상호 평화 공존과 협력 관계 유지를 위한 외교적 호의품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더구나 나주 금동관은 제작 기법과 양식적 특징이 백제와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백제에서 호의품으로 제공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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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토광에 위치한 백제식 석실 (함평 월야면 월계리) |
백제의 영역 확산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광주·전남지역의 성곽ㆍ고분ㆍ위세품(금동관) 등을 보면 이 지역 마한제국들이 6세기초까지 단절없는 성장을 계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말~6세기초에 성행하였던 40m 전후의 거대한 마한 고분들이 6세기 중엽경부터 소규모 백제 고분들로 바뀌는 것은 백제의 병합이 530년경에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와같은 새로운 견해는 기존 이병도 박사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는데 왜 이와 관련된 문헌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만약 그런 자료가 남아 있다면 이병도 박사의 견해는 당연히 그해 따랐을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