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후유증·생활고…마음 속 상처로 50명 가까이 스스로 삶 포기
2020년 02월 25일(화) 00:00 가가
(8) 5·18 피해자 트라우마는 아직도 진행형
대인관계 실패·실직·빈곤 등
신체·정신적 고통에 알코올 의존
유공자·가족 등 4412명 대상
사회적응도 전수조사 계획 차질
진상규명·가해자 처벌
대인관계 실패·실직·빈곤 등
신체·정신적 고통에 알코올 의존
유공자·가족 등 4412명 대상
사회적응도 전수조사 계획 차질
진상규명·가해자 처벌


1980년 5월 29일 광주시 북구 망월동 망월묘역에서 희생자 129명의 장례식이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 속에 치러졌다.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의 관을 두고 오열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고(故) 박정철씨는 1980년 당시 전남도청을 지킨 ‘막내 시민군’으로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 이뤄진 27일까지 도청을 지켰다. 당시 그는 광주상고 1학년(당시 만 16세)으로 5·18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아했다. 이 일로 박씨는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과 교도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생계 때문에 할 수 없이 직장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이렇게 39년을 버텼던 박정철씨는 지난해 8월 5일 끝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올해로 5·18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것만 4차례, 그동안 5·18을 겪은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에서 ‘민주유공자’로, 5·18은 ‘사태’에서 ‘국가기념일’로 바뀌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제 한국민주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됐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장시킨 버팀목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은 아직도 아프다.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날의 참상은 어제 일인 듯 머리 속에서 또렷하게 남아있다. 상처를 견디지 못한 채 극단적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5·18의 폭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5·18자살과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를 한 경상대학교 김명희 교수는 1980년 5월 당시부터 2010년까지 5·18 참가자의 자살자 수를 46명으로 추정했다.
김 교수는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의 발표 자료와 신문 보도 사례를 포함해 수치를 집계했다.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자살자까지 포함할 경우 실제로는 더 많을 수 있다는 게 김 교수 설명이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1980년대가 25명으로 가장 많았고 1990년대 4명, 2000년대 13명, 2010년대 4명이었다.
자살률도 지난 5·18 직후 10년간 높았다가 1990년대 다소 하락세로 돌아서는 듯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하게 극단적 선택을 하는 시민들이 생겨나고 있다. 2004년에는 한해 동안 7명이나 되는 지역민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다.
김 교수는 “1988년 5·18 보상정책의 실행 이후 1990년대 5·18 관련자들의 자살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가 2000년대에 다시 급증했다”면서 “2000년대 자살이 늘어난 데는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 등을 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대부분 알코올에 의존했고 이로 인한 대인관계 실패, 가정문제, 실직, 빈곤을 겪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5·18을 직접 겪음으로 인한 고통 탓에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2세대와 유가족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분석했다.
일시적 보상 외에 5·18에 대한 왜곡 현상과 혐오·폄훼하는 가짜뉴스가 끊이지 않다 보니 가족 간 갈등이나 자존감 훼손 등으로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마저 있다는 것이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8 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의 대부분은 금전 보상 위주의 미봉책과 몇 가지 기념사업뿐”이라며 “진상규명,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과 함께 5·18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전문기관의 설치·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로서는 올해도 쉽지 않다. 당장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에 맞춰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와 생활 실태를 전수조사하려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광주시가 계획했던 ‘5·18 피해자 실태, 후유증 조사’ 사업비가 정부 예산에 한 푼도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국비 5억원을 지원받아 올해 5·18 유공자와 가족 등 4412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 실시 계획을 세웠다가 사업비 미확보로 포기했다.
광주시는 당초 국비를 확보해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유족 등 177명, 부상자 또는 부상자 유족 2765명, 구금자 등 기타 피해자 또는 유족 1470명을 대상으로 대면 조사와 구술 채록 방식의 조사를 통해 당시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가족의 피해가 또 다른 가족에게 옮아가는지 등을 조사해 파괴된 개인사를 복원하겠다는 구상을 세웠었다.
결국 5·18 피해자의 트라우마, 경제적 환경 등 생활 실태, 직업 보유 등 사회적응 정도를 전수조사해 국가폭력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치료 및 지원 대책을 서둘러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기약없이 미뤄지게 됐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5·18자살과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를 한 경상대학교 김명희 교수는 1980년 5월 당시부터 2010년까지 5·18 참가자의 자살자 수를 46명으로 추정했다.
김 교수는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의 발표 자료와 신문 보도 사례를 포함해 수치를 집계했다.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자살자까지 포함할 경우 실제로는 더 많을 수 있다는 게 김 교수 설명이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1980년대가 25명으로 가장 많았고 1990년대 4명, 2000년대 13명, 2010년대 4명이었다.
자살률도 지난 5·18 직후 10년간 높았다가 1990년대 다소 하락세로 돌아서는 듯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하게 극단적 선택을 하는 시민들이 생겨나고 있다. 2004년에는 한해 동안 7명이나 되는 지역민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다.
김 교수는 “1988년 5·18 보상정책의 실행 이후 1990년대 5·18 관련자들의 자살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가 2000년대에 다시 급증했다”면서 “2000년대 자살이 늘어난 데는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 등을 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대부분 알코올에 의존했고 이로 인한 대인관계 실패, 가정문제, 실직, 빈곤을 겪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5·18을 직접 겪음으로 인한 고통 탓에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2세대와 유가족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분석했다.
일시적 보상 외에 5·18에 대한 왜곡 현상과 혐오·폄훼하는 가짜뉴스가 끊이지 않다 보니 가족 간 갈등이나 자존감 훼손 등으로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마저 있다는 것이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8 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의 대부분은 금전 보상 위주의 미봉책과 몇 가지 기념사업뿐”이라며 “진상규명,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과 함께 5·18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전문기관의 설치·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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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 개소식이 2012년 광주시 서구 치평동 광주시도시공사 사옥앞에서 열렸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광주시는 국비 5억원을 지원받아 올해 5·18 유공자와 가족 등 4412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 실시 계획을 세웠다가 사업비 미확보로 포기했다.
광주시는 당초 국비를 확보해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유족 등 177명, 부상자 또는 부상자 유족 2765명, 구금자 등 기타 피해자 또는 유족 1470명을 대상으로 대면 조사와 구술 채록 방식의 조사를 통해 당시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가족의 피해가 또 다른 가족에게 옮아가는지 등을 조사해 파괴된 개인사를 복원하겠다는 구상을 세웠었다.
결국 5·18 피해자의 트라우마, 경제적 환경 등 생활 실태, 직업 보유 등 사회적응 정도를 전수조사해 국가폭력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치료 및 지원 대책을 서둘러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기약없이 미뤄지게 됐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