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5월 21일 ‘집단발포’
2020년 02월 13일(목) 00:00
도청앞 시계탑이 1시 정각을 가리켰다
그 순간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가사 없이 울려 퍼졌다
박효선은 불길한 예감으로
머리끝이 쭈뼛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하는 전율이 흐르는가 싶더니
박병규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YWCA 화장실 벽거울에 비친 자신의 꾀죄죄한 몰골에 놀라서 목욕도 하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으로 귀가하던 길에 다시 금남로 시위대와 합류했다. 끓어오르는 시위대의 분노와 흥분이 박병규를 붙잡았다. 시위대는 어제의 시위대가 아니었다.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가지고 나온 장갑차와 번호판이 없는 지프차, 군용트럭 등을 타고 다녔다. 고속버스, 시외버스, 시내버스, 소방차와 청소차, 불도저 등이 시민들의 시위차량이 되었다. 시위차량은 모두 1백여 대가 넘었다. 관광호텔 부근까지 온 박병규는 도청 앞의 공수부대원들을 보려고 시위트럭 위로 올라갔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가 있고, 1천여 명은 도청 광장 앞에서 시위대와 맞서고 있었다. 7공수여단 35대대와 11공수여단 3개 대대병력이었다. 안병하 도경찰국장의 지휘를 받는 경찰은 공수부대원 뒤쪽에서 2차 방어를 했다. 박병규는 시위대에 밀려 점점 도청 쪽으로 갔다. 공수부대원들이 대형화분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노동청 쪽의 시위대가 남도예술관까지 내려왔다. 시위대 몇 명이 언론을 응징하겠다고 전남일보사가 있는 전일빌딩 셔터를 부수기 시작했다. 몇몇 시위학생 청년들은 전일빌딩에 화염병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40대 시민이 말렸다.

“신문사는 불 지르지 맙시다. MBC방송허고는 다른께.”

지방 신문사는 전국망을 가진 MBC나 KBS처럼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에 화염병을 든 한 청년이 소리쳤다.

“불 지르지 말자니, 당신 프락치그만. 지방 신문이나 중앙 방송 모두 한 통속이요. 침묵은 동조란 말이요.”

“군바리덜이 노리는 것이 뭔지 아요? 방화나 혼란이요. 긍께 불 지르지 말자는 거요.”

“질러라, 불 질러부러.”

그제야 전일빌딩 1층에 있던 외환은행 광주지점의 30대 직원 몇 명이 나와서 시위학생과 청년들에게 싹싹 빌었다.

“이 빌딩이 불타믄 건물주보다 입주자덜 피해가 더 커부요. 건물이야 화재보험에 들었응께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다시 짓을 수 있지만 은행 서류와 돈이 불타불믄 우리는 으쩌게 되겄소?”

많은 시위시민들이 화염병을 던지지 말라고 만류하자 화염병을 든 학생과 청년들이 슬그머니 물러나며 한 마디 했다.

“신문사를 응징헐라고 했지만 건물 안에 든 당신덜을 봐서 포기해분께 그리 아쑈잉.”

시위학생 중에 한 명은 전남일보 윤전실 쪽으로 갔고, 박병규는 도청과 금남로가 잘 보이는 5층 전일도서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도청 시계탑 앞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쓰인 봉축탑이 서 있었다. 초파일을 봉축하기는커녕 왠지 슬프고 생뚱맞게 보였다. 시위대 중에 일부는 물이 펄펄 끓듯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윽고 시위버스가 2대가 공수부대원과 전투경찰이 있는 도청 광장으로 달려갔다. 시위대가 와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시위버스 1대는 분수대를 돌아왔지만 다른 1대는 수십 발의 총성 직후 그 자리에서 멈췄다. 11공수여단 61대대 장교 10여 명이 총을 쏘자 운전사는 버스 유리창에 피를 뿌리며 죽었다.

앞이 뾰쪽한 해병대용 장갑차가 등장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위대 예비군 청년들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가지고 나온 해병대용 장갑차로 공수부대원들을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2명의 공수부대 사병이 시위장갑차에 치였다. 권상운 상병은 좀 전의 운전사처럼 즉사했다.

노동청 쪽에서도 시위차량이 도청 공수부대를 향해 강하게 압박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듣고 동리소극장 밖으로 뛰쳐나온 박효선과 친구 이희규와 박정권은 시위청년 몇 명이 탄 소방차를 보았다. 소방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돌진했다. 시민들이 소방차를 탄 시위청년들에게 박수를 쳤다. 잠시 후 시위청년들이 소방차에서 뛰어내리자, 소방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도청으로 무섭게 내달렸다.

그때, 시위대를 따라가던 중학생이 도청 쪽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고 픽 쓰러졌다. 시위시민들이 모두 보도 쪽으로 피신하자, 눈치를 보던 몇 명의 청년이 길바닥에 쓰러진 중학생을 재빠르게 들쳐 업고 왔다. 박효선은 시위청년들과 함께 총을 맞은 중학생을 김화중 정형외과로 옮겼다. 그러나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하자 청년들은 시위지프차에 중학생을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달렸다.

도청 안에서는 경찰헬기가 12시쯤부터 몇 번이나 이륙하고 착륙했다. 붙잡혀온 시위청년 중에 부상이 심한 환자를 이송하거나 도청의 중요서류를 옮기고 있었다. 실제로 공수부대원들이 연행해온 시위학생과 청년들을 경찰이 도청 뒷담 비상문으로 도망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시위하다가 전경에게 붙잡혀 온 방위병 이재춘도 그때 탈출해 도청 뒤 오외과에 입원했다. 아무튼 도청 안팎으로 위기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분명했다.

잠시 후, 도청 앞 시계탑이 1시 정각을 가리켰다. 그 순간 도청 옥상 네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가사 없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느닷없는 애국가 소리에 보도로 물러나 있던 시위대는 움찔했다. 박효선은 불길한 예감으로 머리끝이 쭈뼛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하는 전율이 흐르는가 싶더니 일제히 도청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제까지 산발적인 총성은 있었지만 집단 발포한 M16 총소리는 처음이었다. 박효선은 군대에서 익힌 대로 이희규와 박정권에게 소리쳤다.

“엎드려부러!”

보도로 물러나 있던 시위청년 시민들도 엎드리거나 아니면 이면도로로 도망쳤다. 시위대는 총성이 멎은 후에도 도로로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시위대 중에 사상자는 없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공수가 허공에다 총질했는갑소!”

“그래도 조심허씨요. 상부에서 발포 명령을 내린 거 같아부요.”

예비군복을 입은 시민이 대꾸하듯 외쳤다. 동리소극장으로 돌아온 박효선이 방금 중학생의 허리를 받쳐 들다가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정권아, 신성한 애국가를 발포 명령으로 이용헐 수 있냐?”

“아이고메, 학살 신호로 애국가를 이용했다믄 국가관도 도덕성도 ?는 놈덜이제.”

이희규도 동조했다.

“니덜 말이 맞다. 놈덜은 정권을 탈취허기 위해 신성헌 애국가를 모독허고 애국가를 불러온 우리덜 마음까지 뭉개분 것이여.”

손에 묻은 피를 다 닦은 박효선이 말했다.

“내 소극장이지만 여그 있다가는 숨었다는 오해 받겄다. 인자 나가자.”

“돌멩이도 못 드는 니가 뭔 싸움이냐?”

박정권의 말에 박효선이 대답했다.

“나는 겁이 많응께 앞에 나서지는 못하제, 그래도 쓰러진 사람덜을 병원으로 나를 수는 있어야. 그것도 사람 살리는 일이 아니냐?”

“니 말이 맞다. 소극장 앞에 붙인 대자보는 니가 쓴 거 같든디. 필체를 본께.”

“응, ‘전남인이여 궐기하자’는 대자보는 내가 써부렀제.”

세 사람은 중앙국민학교 후문 길을 이용해 금남로 3가 쪽으로 나갔다.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충장로, 제봉로 등으로 흩어졌던 시위대가 다시 한일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의 양쪽 보도에 모여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젊은 청년 1천여 명 정도가 결사대인 듯 나타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대 목소리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는 결기가 묻어 있었다. 이제 ‘전두환 물러가라’는 시위대의 입에 붙었고, 누군가가 새로운 구호를 만들어 선창했다.

‘최 돼지 물러가라’

‘끝까지 광주를 사수하자’

‘연행자를 석방하라’

구호를 외쳐댄 젊은 시위대는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고향의 부모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출정가처럼 비장했다. 어떤 청년은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흘렸다. 공수부대와 싸울 장소는 바로 눈앞이었다. 금남로는 도청 앞까지 텅 비어 있었다. 이희규가 말했다.

“나는 키가 작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응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자.”

“위급헌 상황을 판단헐라믄 그게 좋겄다.”

세 사람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금남로 3가에 있는 한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건물에 세든 화랑주인이 자신도 올라가는 중이라며 옥상 문을 열어주었다. 세 사람은 금남로를 내려다보는 순간 호흡이 턱 막혔다. 금남로는 터질 듯한 긴장감과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공수부대원들은 멀리서 무릎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시위대의 구호가 다시 터져 나왔다. 시위청년 대여섯 명이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나와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청년 중에 한 명은 대형태극기를 흔들었다. 화랑주인이 소리쳤다.

“아니, 공수놈덜이 시민을 죽이네!”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자 대형태극기에 붉은 피가 번졌다. 공수부대원들과 시위청년의 거리는 불과 300여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대여섯 명의 시위청년은 맥없이 쓰러졌다. 도청 앞 공수부대 사격수와 건물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의 정조준 집중사격이 분명했다. 시위학생과 청년들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한 무리의 시위청년들이 낮은 자세로 기어가 쓰러진 청년들을 들쳐 업고 나왔다.

화랑주인이 총탄에 쓰러진 청년들의 숫자를 정(正)자를 쓰며 셌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낸중에 때가 되믄 증언헐라고 그라요.”

박효선과 박정권, 이희규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어어! 또 쓰러질라고!”

또 다시 대여섯 명의 청년이 도로 한 복판으로 뛰어가 구호를 외쳤다. 그 중에 한 명은 이전과 같이 대형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들 역시 집중사격으로 도로에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이에 시위청년들도 망설이지 않았다. 낮은 포복을 하며 다가가 그들을 들쳐 업고 돌아왔다.

박효선은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대여섯 명의 청년이 도로로 뛰어나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어 총성이 고막을 찢듯 울렸다. 박효선은 더 이상 거리를 내려다보지 않고 옥상 계단을 내려와 버렸다. 두 친구도 박효선을 뒤따랐다. 화랑주인만이 옥상에 남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정(正)자를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正)자를 또박또박 썼지만 두 번째 정(正)자부터는 제 정신이 아닌 듯 수전증 환자처럼 흐물흐물 흘려 썼다.

시위청년들이 도로 한복판에서 연달아 세 번이나 쓰러지자, 보도로 물러나 있던 시위시민들이 도로로 나아갔다. 이면도로에서 서성이던 시위시민들이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금남로는 오전처럼 시위인파로 채워졌다. 시위인파는 곧장 관광호텔 앞까지 들어찼다.

그때였다. 바퀴 달린 시위장갑차 1대가 도청 분수대 쪽으로 달렸다. 장갑차 뚜껑을 열고 한 청년이 용감하게 상체를 드러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은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도청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 청년을 향해 가차 없이 집중사격을 했다. 목에 총을 맞은 듯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공수부대원의 집중사격으로 충장로 입구 빌딩에 있던 노인과 동구청 앞의 학생과 처녀, 시민 등 8명이 쓰러졌다.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던 시위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노동청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시민들이 쓰러진 사람들 중에 경상자는 동구청 뒤 홍안과로, 중상자는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으로 시위차량에 실어 갔다.

시위장갑차의 돌진에 자극받은 시위대는 시동을 건 청소차를 도청 쪽으로 달리게 했다. 청소차는 YMCA 앞의 공수부대의 바리케이드를 치받고는 불탔다. 그러자 시위대는 충금지하상가에 있던 불도저를 끌고 와서 도청 쪽으로 돌진케 했다. 그러나 운전자가 없는 불도저는 우성빌딩 길목에 이르러 도로 턱에 부딪쳐 멈추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무장헬기가 시위대에게 기총사격을 했다. 무등산 쪽에서 상무대로 날아가던 무장헬기가 광주천 불로교 부근의 시위대에게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했다. 조금 전까지 연행자는 모두 석방하겠다는 선무방송을 하던 헬기가 아니었다. 계림동성당 사제관을 나서던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것만도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세 번의 기총사격이었다. 기총사격의 불빛이 길게는 1미터 정도로 쭉쭉 사선으로 뻗었다. 조비오 신부는 반사적으로 성당 담벼락에 붙어 헬기를 응시했다. 헬기는 순식간에 사직공원을 넘어 월산동 쪽으로 사라졌다. 조비오 신부는 너무 놀라 가톨릭센터로 가려던 생각을 접고 사제관으로 돌아와 버렸다. 헬기의 기총사격까지 받은 시위대는 생명존엄의 날이기도 한 초파일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금남로에서 가까운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병원만도 부상자 100여 명, 사망자 14명에 이르렀다.

박효선은 두 친구와 조금 전에 불타버린 세무서 앞에서 헤어졌다. 시위대 앞에 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흔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집중사격을 거부하고 뿔뿔이 해산했다는 소문이 시위대 사이에서 돌았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다!”

“공수놈덜 철수도 시간문제다!”

시위대는 광주경찰서를 점거했다. 점거라기보다는 시위대가 압박하자 경찰들이 떠나버렸다는 표현이 옳았다. 시위대는 폭도가 아니었다. 경찰서 경리계의 금고를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고에는 광주경찰서 경찰들의 5월 봉급용 돈다발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지만 시위시민 중에 돈다발을 훔치려고 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미처 금고를 잠그지 않은 광주경찰서 경리담당 여경만 안절부절 애를 태웠을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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