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5월 21일 ‘도청앞으로’
2020년 01월 30일(목) 00:00 가가
“형님이 우리나라와 광주를 위해
싸운다믄 저도 마찬가지지라
저뿐만 아니라 친구
선후배덜이 다 나섰지라
여그서 빠지믄 비겁헌 놈이랑께요”
“좋다, 후회허지 않겄다는 말이제?”
싸운다믄 저도 마찬가지지라
저뿐만 아니라 친구
선후배덜이 다 나섰지라
여그서 빠지믄 비겁헌 놈이랑께요”
“좋다, 후회허지 않겄다는 말이제?”
사월 초파일, 부처가 탄생한 날이라고 해서 석가탄신일이라고 불렀다. 공휴일이었지만 김준봉은 회사가 궁금하여 출근하는 길이었다. 공단 앞으로 흐르는 시궁창 옆길을 지나는데, 지프차가 한 대 처박혀 있었다. 시위대가 타고 다니다가 운전미숙으로 사고 난 지프차 같았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렸지만 시내버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어쩌다 시외버스가 멀리 외각도로로 무당벌레처럼 오갈 뿐이었다. 화정동 쪽으로 나 있는 지하도에는 타이탄 트럭과 자가용 한 대가 불탄 채 버려져 있었다. 트럭의 번호판까지 검게 그을려 어디 차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김준봉은 시위대가 탄 시위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유동 쪽으로 가는 차였으므로 양동시장 입구에서 내렸다. 양동시장 앞에서는 시위차량이 빈번하게 돌아다녔다. 김준봉은 시위승합차를 바꿔 탄 뒤 사무실 부근에서 내렸다. 시내는 온통 시위대를 나르는 버스와 승합차, 지프차들만 운행 중이었다.
시위대는 귀에 익은 구호와 훌라송을 부르며 도청 앞 금남로로 모여들고 있었다. 시위청년 시민들은 벌써 가톨릭센터 앞까지 가득 찼다. 마치 긴 풍선에 바람이 채워지듯 쑥쑥 팽팽하게 불어났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터져버릴 것처럼. ‘김대중 씨 석방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전두환 물러가라. 훌라 훌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훌라 훌라.’
외환은행 앞에는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시동을 걸어놓은 상태로 서 있었다. 시위대가 더 이상 도청 쪽으로 접근하지 않도록 위협을 가했다. 김준봉은 상사에게 얼굴만 비치고는 시위상황을 살피기 위해 사무실을 들락날락했다.
그런데 거리에 긴장감만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증심사 성연은 노동청 앞까지 신도들과 함께 불단에 올렸던 떡과 과일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나눠 주었다. 시민들이 초파일인데도 시위하느라고 절에 올라오지 않으니 그렇게 마음을 냈다. 금남로 쪽은 원각사와 관음사 신도들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떡과 과일을 돌렸다. 거리 한쪽에는 상점에서 내놓은 빵과 음료수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위청년 시민들의 끼니였다. 양동시장이나 남광주시장, 대인시장 등에서도 김밥과 음료수를 시장 앞에 내놓고 시위대라면 누구라도 먹을 수 있게 했다. 며칠 전과 달라진 자발적인 풍경이었다.
문장우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학동 버스종점 부근까지 나왔을 때 유리창이 깨진 시위버스가 지나갔다. 시위버스 옆면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쓰여 있었다. 시위청년들은 각목을 들고 시위버스 옆면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쳤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떨며 눈치껏 움직였는데 완전히 바뀐 모습이었다. 시위청년 시민들은 마치 시내를 장악한 것처럼 행동했다. 문장우는 흐뭇하고 뿌듯해서 시위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광주시민들이 일심동체가 된 것 같았다. 문장우는 학동 석천다리까지 걸어가 행인에게 담배를 한 대 얻어 피운 뒤, 시내로 들어가는 시위버스를 탔다. 시위버스에 오르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형님!”
한 동네 사는 후배 김춘국이었다. 시위버스에서 후배를 만나니 더 반가웠다. 그러나 후배가 왠지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허세를 부리는 청년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춘국아, 니는 들어가거라.”
“괜찮그만요. 형님이 걱정이지라. 형님은 형수님이나 자식이 지달리는 식구가 있응께라. 긍께 형님은 들어가셔야지라.”
평소에 보고 느꼈던 김춘국이 아니었다. 후배라고 하여 어리게만 보았는데 마른 대추처럼 여물고 단단해 보였다. 광주의 시위상황을 보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문장우는 김춘국을 시험하듯 에둘러 말했다.
“무신 소리냐? 나는 괜찮아야. 니가 뭣을 안다고 그러냐?”
“고로코름 말씸허시는 형님은 또 뭣을 안다고 그러신게라?”
문장우는 김춘국이 되묻자 말문이 막혔다. 김춘국은 문장우를 내심 놀라게까지 성숙한 말을 했다.
“형님이 우리나라와 광주를 위해 싸운다믄 저도 마찬가지지라. 저뿐만 아니라 친구 선후배덜이 다 나섰지라. 여그서 빠지믄 비겁헌 놈이랑께요. 달고 댕기는 부랄을 떼부러야지라.”
김춘국이 시위버스에 오른 것은 분명 군중심리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좋다. 후회허지 않겄다는 말이제?”
“두 말 허믄 잔소리지라.”
“그럼, 춘국아. 죽어도 같이 죽자!”
문장우는 김춘국과 새삼 마음이 통해 노동청을 지나 시위버스에서 함께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도청 앞으로 들어가는 세 갈래의 도로는 시위청년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관광호텔 쪽으로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관광호텔 앞에는 대형태극기로 두 시신을 덮은 리어카가 도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광주역에서 시위청년 시민들이 끌고 온 리어카였다. 두 사람은 좀 더 가깝게 보기 위해 수협 계단에 올라 두 시신을 바라보았다. 리어카 밖으로 나온 두 시신의 다리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덜렁덜렁 움직였다. 김춘국은 두 시신의 다리를 본 순간 분노가 끓어올랐다.
김현채는 리어카를 앞세운 전춘심의 방송차를 따라가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떨어졌다. 전날 화염병용으로 승용차의 기름을 빼다가 몇 모금 마신 탓에 속이 메스꺼워서였다. 마침 가톨릭센터 앞에서도 시위청년들이 복면을 한 채 신문지를 깔아놓고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김현채도 그곳에 주저앉아 콜라병에 휘발유를 넣고 신문지를 말아 병 입구를 틀어막았다. 화염병이 70여 개쯤 되자 시위청년들이 공수부대가 있는 도청 쪽으로 가져갔다.
점심때가 되자 김밥과 빵, 음료수를 실은 리어카들이 보였다. 리어카에는 각 동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각동 주민들이 보내주었다는 표시였다. 조금 뒤에는 트럭이 오더니 거북선 담배 한 박스를 가져왔다. 김현채는 담배를 보고 소리쳤다.
“아저씨, 담배는 지가 나눠줄께라.”
김현채는 열대엿 보루의 담배를 원하는 시위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름대로 시위를 했다고 짐작되는 시민을 찾아서 주었다.
“아저씨는 쪼깐 지달리쇼. 저 형씨부텀 줄께라.”
“기준이 뭣이여?”
“옷이 깨깟헌 사람보담 더러운 사람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데모했겄지라잉.”
“아따, 젊은 사람이 솔찬히 똑똑헝마. 말 돼부네, 되부러.”
손을 내밀었던 와이셔츠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선선히 물러섰다. 김현채는 담배를 다 나눠주고는 상업은행 화단을 올라가 앉아 배급받은 빵을 먹었다.
나주 다보사로 떠났던 진각도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증심사 성연과 통화했는데 시민들의 시위를 외면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진각은 광산 대촌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가 걸어서 서창을 지났다. 시 외곽지역도 이제는 거의 봉쇄된 채 시위버스만 다녔다. 시위청년 시민들은 차츰 흥분해가고 있었다. 시위대 중에 누군가가 대형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이중삼중으로 쳐놓은 공수부대 앞에다가 타이어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시내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기둥이 치솟았다. 머리에 띠를 두른 시위청년들이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꺼내왔다는 군용특수차량을 애국가를 부르며 끌고 다녔고, 시민들은 박수치며 환호했다. 축제를 난폭하게 치르는 도시 같았다. 그러나 진각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웠다.
‘누군가 주체가 되어 질서 있게 싸워야 허는디. 즉흥적으로 해결헐 문제가 아닌디.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낼 으떤 구심력이 있어야 허는디. 그것은 뭘까. 그래, 유인물이라도 맨들자. 플래카드라도 제작해서 달자.’
진각은 길거리에 나와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말했다.
“우왕좌왕해서는 우리덜이 저 놈덜 전략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응께 목적이 분명해야 허요. 저 놈덜은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님, 뭣을 도와드릴께라?”
“유인물을 많이 맹글어 붙이고 프랑카드를 여그저그에 달아야 헐랑갑소. 중구난방 시위를 승화시킬라믄.”
진각의 승복을 보고 믿음이 갔는지 젊은이들이 쉽게 응했다. 간판가게 주인도 진각이 도움을 요청하자 흔쾌하게 승낙했다. 진각은 지나가는 시위지프차를 세우고 용건을 말했다.
“프랑카드를 맨들라고 허는디 천이 필요허요. 양동시장으로 갑시다.”
“좋은 일인께 타쇼!”
진각은 젊은이 몇 명과 함께 시위지프차에 탔다. 몇 명이 차에 오르자 먼저 타고 있던 시위청년들과 섞이어 지프차는 콩나물시루가 됐다. 한두 명이 지프차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았지만 운전기사는 거칠게 급발차를 했다. 양동시장 입구에서는 상인들이 여전히 시위대에게 김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진각은 아침을 다보사에서 먹고 나왔으므로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바로 이불가게로 가서 천을 달라고 하자 이불가게 주인이 말했다.
“잘 왔그만이라. 우리덜도 뭔가 도와주고 ?었는디. 필요헌 대로 다 가져가부씨요.”
진각 일행은 흰 이불천을 도로변으로 가지고 나와 작업을 시작했다. 페인트는 젊은이들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페인트상점까지 가서 구해왔다.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해와 페인트에 섞었지만 묽게 잘 녹지 않고 찐득찐득했다. 그때 시위트럭이 멈추더니 도장공 오인수가 말했다.
“신나를 섞어야지라. 그래야 잘 녹제. 신나는 문짝 짜는 가게에도 많응께 여그 시장서 구헐 수 있겄그만요.”
오인수는 어제부터 변두리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그의 말대로 양동시장 안에서 신나를 구해와 섞으니 쫀득한 페인트가 부드럽게 녹았다. 진각은 붓을 들고 ‘최후 일각까지’, ‘오호통제라’, ‘오후 3시까지 도청으로 집결하라’ 등의 구호를 썼다. 어느 새 30여 명의 동조자가 모였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구호를 쓰기도 했다. 한약방 주인이 합세해 쓴 붓글씨는 서예경력이 있는 듯 구호의 품격이 달랐다. 진각은 도로변을 지나는 시위차량에 플래카드를 달아주기도 했고, 시위차량에 직접 구호를 쓰기도 했다. 양동상인들이 빵과 음료수를 박스째 갖다 주었지만 진각은 점심끼니를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이 붓을 휘둘렀다. 시위차량 수십여 대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인수가 운전하는 트럭에는 어제부터 고교생 최치수도 타고 있었다. 최치수는 어제와 같이 변두리 주민들에게 시위에 가담하라고 외치며 트럭에 태우는 일을 했다. 아침부터 외치고 다녔더니 목이 쉬었다. 최치수는 더 이상 목을 쓸 수가 없었으므로 트럭에서 내려 금남로 가톨릭센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의 뒤쪽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멈추었다. 트럭에 타고 있던 시위청년들 중에 안면이 있는 한 명이 교복 차림의 최치수 손을 잡아끌었다. 한 손에 각목을 들고 있으니까 용감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어떤 아주머니가 하소연을 했다.
“학생, 내 아들도 죽었어. 얼능 내려와. 청년덜도 빨리 내려와.”
할 수 없이 모두가 트럭에서 내렸지만 시위청년들은 트럭을 방치하지는 않았다. 시동을 건 트럭에 불을 지른 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트럭은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달리더니 관광호텔 앞 가로수에 부딪치고 말았다.
최치수는 광주은행 본점 앞으로 가서 김밥과 우유 1개를 받았다. 시민들이 무등경기장 부근의 롯데제과에서 빵과 우유, 음료수를 트럭으로 실어와 광주은행 본점 앞에 부려놓고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는데도 끼리끼리 모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이나 김수영, 대동고 학생 등도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학생들끼리 무리를 지어 빵과 음료수를 받아먹었다.
집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박래풍이나 김용호도 길거리에 있는 빵과 김밥으로 아침 점심끼니를 때웠다. 지갑도 가벼워졌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양동시장이나 금남로에서 끼니를 해결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점심 전에 양동시장에서 광주은행 본점까지 걸어와 각각 김밥 두 줄과 우유 1개, 콜라 2병을 받아먹고는 느긋하게 도청으로 걸어가다가 서방에서 시위승합차를 타고 온 염동유를 스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군용헬기 1대가 프로펠러 소리를 기분 나쁘게 내지르며 금남로 상공을 날았다. 시위대 가운데 누군가가 파출소에서 탈취한 엠1소총으로 군용헬기를 쏘았다. 그러자 군용헬기는 도청으로 가려다가 방향을 틀어 조선대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박래풍과 김용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거 총 맞고 떨어져부러야 허는디.”
“엠1 갖고 대간디? 대공포를 쏴부러야제.”
도청에서 군용헬기와 경찰헬기가 번갈아가며 뜨고 내리는 것이 수상쩍었다. 사라진 군용헬기 쪽으로 시위청년들이 감자를 먹였다.
“뭔가 수작을 부리는 모냥이여.”
“경찰헬기는 도지사나 시장이 타고 댕긴다고 허드만.”
“내 생각에는 뭔가 중요서류를 나르는 거 같그만.”
“아따, 유식허네잉. 학생이요?”
“전대생입니다. 도청이 불타버릴 수도 있겄지라. 어저께 MBC같이.”
전대생은 목이 마르다며 곧 그 자리를 떴다. 물은 아무 곳에서나 마실 수 있었다. 광주경찰서도 마음대로 들어갔다. 어제부터 출입을 제지하는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
그런데 거리에 긴장감만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증심사 성연은 노동청 앞까지 신도들과 함께 불단에 올렸던 떡과 과일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나눠 주었다. 시민들이 초파일인데도 시위하느라고 절에 올라오지 않으니 그렇게 마음을 냈다. 금남로 쪽은 원각사와 관음사 신도들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떡과 과일을 돌렸다. 거리 한쪽에는 상점에서 내놓은 빵과 음료수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위청년 시민들의 끼니였다. 양동시장이나 남광주시장, 대인시장 등에서도 김밥과 음료수를 시장 앞에 내놓고 시위대라면 누구라도 먹을 수 있게 했다. 며칠 전과 달라진 자발적인 풍경이었다.
문장우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학동 버스종점 부근까지 나왔을 때 유리창이 깨진 시위버스가 지나갔다. 시위버스 옆면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쓰여 있었다. 시위청년들은 각목을 들고 시위버스 옆면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쳤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떨며 눈치껏 움직였는데 완전히 바뀐 모습이었다. 시위청년 시민들은 마치 시내를 장악한 것처럼 행동했다. 문장우는 흐뭇하고 뿌듯해서 시위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광주시민들이 일심동체가 된 것 같았다. 문장우는 학동 석천다리까지 걸어가 행인에게 담배를 한 대 얻어 피운 뒤, 시내로 들어가는 시위버스를 탔다. 시위버스에 오르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형님!”
한 동네 사는 후배 김춘국이었다. 시위버스에서 후배를 만나니 더 반가웠다. 그러나 후배가 왠지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허세를 부리는 청년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춘국아, 니는 들어가거라.”
“괜찮그만요. 형님이 걱정이지라. 형님은 형수님이나 자식이 지달리는 식구가 있응께라. 긍께 형님은 들어가셔야지라.”
평소에 보고 느꼈던 김춘국이 아니었다. 후배라고 하여 어리게만 보았는데 마른 대추처럼 여물고 단단해 보였다. 광주의 시위상황을 보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문장우는 김춘국을 시험하듯 에둘러 말했다.
“무신 소리냐? 나는 괜찮아야. 니가 뭣을 안다고 그러냐?”
“고로코름 말씸허시는 형님은 또 뭣을 안다고 그러신게라?”
문장우는 김춘국이 되묻자 말문이 막혔다. 김춘국은 문장우를 내심 놀라게까지 성숙한 말을 했다.
“형님이 우리나라와 광주를 위해 싸운다믄 저도 마찬가지지라. 저뿐만 아니라 친구 선후배덜이 다 나섰지라. 여그서 빠지믄 비겁헌 놈이랑께요. 달고 댕기는 부랄을 떼부러야지라.”
김춘국이 시위버스에 오른 것은 분명 군중심리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좋다. 후회허지 않겄다는 말이제?”
“두 말 허믄 잔소리지라.”
“그럼, 춘국아. 죽어도 같이 죽자!”
문장우는 김춘국과 새삼 마음이 통해 노동청을 지나 시위버스에서 함께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도청 앞으로 들어가는 세 갈래의 도로는 시위청년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관광호텔 쪽으로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관광호텔 앞에는 대형태극기로 두 시신을 덮은 리어카가 도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광주역에서 시위청년 시민들이 끌고 온 리어카였다. 두 사람은 좀 더 가깝게 보기 위해 수협 계단에 올라 두 시신을 바라보았다. 리어카 밖으로 나온 두 시신의 다리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덜렁덜렁 움직였다. 김춘국은 두 시신의 다리를 본 순간 분노가 끓어올랐다.
김현채는 리어카를 앞세운 전춘심의 방송차를 따라가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떨어졌다. 전날 화염병용으로 승용차의 기름을 빼다가 몇 모금 마신 탓에 속이 메스꺼워서였다. 마침 가톨릭센터 앞에서도 시위청년들이 복면을 한 채 신문지를 깔아놓고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김현채도 그곳에 주저앉아 콜라병에 휘발유를 넣고 신문지를 말아 병 입구를 틀어막았다. 화염병이 70여 개쯤 되자 시위청년들이 공수부대가 있는 도청 쪽으로 가져갔다.
점심때가 되자 김밥과 빵, 음료수를 실은 리어카들이 보였다. 리어카에는 각 동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각동 주민들이 보내주었다는 표시였다. 조금 뒤에는 트럭이 오더니 거북선 담배 한 박스를 가져왔다. 김현채는 담배를 보고 소리쳤다.
“아저씨, 담배는 지가 나눠줄께라.”
김현채는 열대엿 보루의 담배를 원하는 시위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름대로 시위를 했다고 짐작되는 시민을 찾아서 주었다.
“아저씨는 쪼깐 지달리쇼. 저 형씨부텀 줄께라.”
“기준이 뭣이여?”
“옷이 깨깟헌 사람보담 더러운 사람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데모했겄지라잉.”
“아따, 젊은 사람이 솔찬히 똑똑헝마. 말 돼부네, 되부러.”
손을 내밀었던 와이셔츠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선선히 물러섰다. 김현채는 담배를 다 나눠주고는 상업은행 화단을 올라가 앉아 배급받은 빵을 먹었다.
나주 다보사로 떠났던 진각도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증심사 성연과 통화했는데 시민들의 시위를 외면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진각은 광산 대촌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가 걸어서 서창을 지났다. 시 외곽지역도 이제는 거의 봉쇄된 채 시위버스만 다녔다. 시위청년 시민들은 차츰 흥분해가고 있었다. 시위대 중에 누군가가 대형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이중삼중으로 쳐놓은 공수부대 앞에다가 타이어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시내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기둥이 치솟았다. 머리에 띠를 두른 시위청년들이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꺼내왔다는 군용특수차량을 애국가를 부르며 끌고 다녔고, 시민들은 박수치며 환호했다. 축제를 난폭하게 치르는 도시 같았다. 그러나 진각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웠다.
‘누군가 주체가 되어 질서 있게 싸워야 허는디. 즉흥적으로 해결헐 문제가 아닌디.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낼 으떤 구심력이 있어야 허는디. 그것은 뭘까. 그래, 유인물이라도 맨들자. 플래카드라도 제작해서 달자.’
진각은 길거리에 나와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말했다.
“우왕좌왕해서는 우리덜이 저 놈덜 전략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응께 목적이 분명해야 허요. 저 놈덜은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님, 뭣을 도와드릴께라?”
“유인물을 많이 맹글어 붙이고 프랑카드를 여그저그에 달아야 헐랑갑소. 중구난방 시위를 승화시킬라믄.”
진각의 승복을 보고 믿음이 갔는지 젊은이들이 쉽게 응했다. 간판가게 주인도 진각이 도움을 요청하자 흔쾌하게 승낙했다. 진각은 지나가는 시위지프차를 세우고 용건을 말했다.
“프랑카드를 맨들라고 허는디 천이 필요허요. 양동시장으로 갑시다.”
“좋은 일인께 타쇼!”
진각은 젊은이 몇 명과 함께 시위지프차에 탔다. 몇 명이 차에 오르자 먼저 타고 있던 시위청년들과 섞이어 지프차는 콩나물시루가 됐다. 한두 명이 지프차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았지만 운전기사는 거칠게 급발차를 했다. 양동시장 입구에서는 상인들이 여전히 시위대에게 김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진각은 아침을 다보사에서 먹고 나왔으므로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바로 이불가게로 가서 천을 달라고 하자 이불가게 주인이 말했다.
“잘 왔그만이라. 우리덜도 뭔가 도와주고 ?었는디. 필요헌 대로 다 가져가부씨요.”
진각 일행은 흰 이불천을 도로변으로 가지고 나와 작업을 시작했다. 페인트는 젊은이들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페인트상점까지 가서 구해왔다.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해와 페인트에 섞었지만 묽게 잘 녹지 않고 찐득찐득했다. 그때 시위트럭이 멈추더니 도장공 오인수가 말했다.
“신나를 섞어야지라. 그래야 잘 녹제. 신나는 문짝 짜는 가게에도 많응께 여그 시장서 구헐 수 있겄그만요.”
오인수는 어제부터 변두리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그의 말대로 양동시장 안에서 신나를 구해와 섞으니 쫀득한 페인트가 부드럽게 녹았다. 진각은 붓을 들고 ‘최후 일각까지’, ‘오호통제라’, ‘오후 3시까지 도청으로 집결하라’ 등의 구호를 썼다. 어느 새 30여 명의 동조자가 모였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구호를 쓰기도 했다. 한약방 주인이 합세해 쓴 붓글씨는 서예경력이 있는 듯 구호의 품격이 달랐다. 진각은 도로변을 지나는 시위차량에 플래카드를 달아주기도 했고, 시위차량에 직접 구호를 쓰기도 했다. 양동상인들이 빵과 음료수를 박스째 갖다 주었지만 진각은 점심끼니를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이 붓을 휘둘렀다. 시위차량 수십여 대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인수가 운전하는 트럭에는 어제부터 고교생 최치수도 타고 있었다. 최치수는 어제와 같이 변두리 주민들에게 시위에 가담하라고 외치며 트럭에 태우는 일을 했다. 아침부터 외치고 다녔더니 목이 쉬었다. 최치수는 더 이상 목을 쓸 수가 없었으므로 트럭에서 내려 금남로 가톨릭센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의 뒤쪽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멈추었다. 트럭에 타고 있던 시위청년들 중에 안면이 있는 한 명이 교복 차림의 최치수 손을 잡아끌었다. 한 손에 각목을 들고 있으니까 용감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어떤 아주머니가 하소연을 했다.
“학생, 내 아들도 죽었어. 얼능 내려와. 청년덜도 빨리 내려와.”
할 수 없이 모두가 트럭에서 내렸지만 시위청년들은 트럭을 방치하지는 않았다. 시동을 건 트럭에 불을 지른 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트럭은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달리더니 관광호텔 앞 가로수에 부딪치고 말았다.
최치수는 광주은행 본점 앞으로 가서 김밥과 우유 1개를 받았다. 시민들이 무등경기장 부근의 롯데제과에서 빵과 우유, 음료수를 트럭으로 실어와 광주은행 본점 앞에 부려놓고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는데도 끼리끼리 모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이나 김수영, 대동고 학생 등도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학생들끼리 무리를 지어 빵과 음료수를 받아먹었다.
집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박래풍이나 김용호도 길거리에 있는 빵과 김밥으로 아침 점심끼니를 때웠다. 지갑도 가벼워졌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양동시장이나 금남로에서 끼니를 해결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점심 전에 양동시장에서 광주은행 본점까지 걸어와 각각 김밥 두 줄과 우유 1개, 콜라 2병을 받아먹고는 느긋하게 도청으로 걸어가다가 서방에서 시위승합차를 타고 온 염동유를 스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군용헬기 1대가 프로펠러 소리를 기분 나쁘게 내지르며 금남로 상공을 날았다. 시위대 가운데 누군가가 파출소에서 탈취한 엠1소총으로 군용헬기를 쏘았다. 그러자 군용헬기는 도청으로 가려다가 방향을 틀어 조선대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박래풍과 김용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거 총 맞고 떨어져부러야 허는디.”
“엠1 갖고 대간디? 대공포를 쏴부러야제.”
도청에서 군용헬기와 경찰헬기가 번갈아가며 뜨고 내리는 것이 수상쩍었다. 사라진 군용헬기 쪽으로 시위청년들이 감자를 먹였다.
“뭔가 수작을 부리는 모냥이여.”
“경찰헬기는 도지사나 시장이 타고 댕긴다고 허드만.”
“내 생각에는 뭔가 중요서류를 나르는 거 같그만.”
“아따, 유식허네잉. 학생이요?”
“전대생입니다. 도청이 불타버릴 수도 있겄지라. 어저께 MBC같이.”
전대생은 목이 마르다며 곧 그 자리를 떴다. 물은 아무 곳에서나 마실 수 있었다. 광주경찰서도 마음대로 들어갔다. 어제부터 출입을 제지하는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