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래공수거
2020년 01월 23일(목) 00:00
수(數)의 단위에서 가장 높은 것이 무량대수다. 10의 68승이나 88승 또는 128승이라고들 하는데, 불가사의·나유타·아승기·항하사·극·재·정 등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헤아리기 힘든 수들이다. 조(兆)와 경(京)만 해도 엄청난 수다. 억(億)의 만 배가 조, 조의 만 배가 경이다. 1조 원은 100만 원을 100만 일 즉 2740년 동안 쓸 수 있는 금액이다.

지난해 포브스코리아와 포브스글로벌이 ‘2019년 한국 50대 부자’를 조사해 선정했는데, 이들의 재산이 모두 1조 원을 넘었다. 올해로 6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조8022억 원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2018년 2위로 10계단 뛰어오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도 8조7224억 원으로 2위 자리 수성에 성공했다. 50명 가운데 23명이 자수성가형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이 최근 영면에 들었다. 1942년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갈 때만 해도 그의 전 재산은 83엔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9년 롯데그룹의 매출은 100조 원대에 이르렀다. 신 명예회장이 가진 주식과 부동산 등 개인 재산도 1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의 결혼으로 네 명의 자녀를 뒀는데, 유산은 이들이 4분의1씩 나눠 가질 것으로 보인다.

재산만큼 유명한 것은 형제 간 분쟁이었다. 5남 5녀 중 맏이인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껌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인 1968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는 형제들을 경영에 참여시켰지만 재산이 늘어나며 다툼이 잦아졌고 끝내 서로 삿대질하며 헤어졌다. 그의 병세가 완연해진 2015년에는 아들들이 경영권 쟁탈전을 벌이며 그 민낯이 드러나기도 했다. 1조 원이 넘는 개인 재산과 100조 원의 기업을 일군 그였지만, 말년은 외롭고 쓸쓸했을 것이다.

설 연휴, 가족의 정과 고향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한 푼도 저세상으로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족과 고향의 가치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윤현석 정치부 부장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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