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5월 20일 ‘차량시위’
2020년 01월 09일(목) 00:00 가가
“나는 화순터미널서 버스승객덜헌티
광주 얘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너릿재를 넘어왔소.”
“아따, 래풍이는 여그 온 이유가
거창하그만잉. 하하.”
“나는 그냥 송정리 집으로 갈라고 해도
공수새끼덜이 네 군데를 다 막아불고
광주 얘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너릿재를 넘어왔소.”
“아따, 래풍이는 여그 온 이유가
거창하그만잉. 하하.”
“나는 그냥 송정리 집으로 갈라고 해도
공수새끼덜이 네 군데를 다 막아불고
광주역 앞에서 영업하는 택시기사들이 자주 찾는 기사식당은 신안동 중앙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었다. 기사식당은 허름했지만 해장국밥이 별미였다. 20일 이른 아침에도 네댓 명이 둘러앉아서 해장국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병규를 농성동까지 태우고 갔다 온 기사도 끼어 있었는데 화제는 단연 공수부대원들이었다. 모두가 분통을 터트렸다. 이마에 약을 바른 기사가 먼저 학생을 태우고 광남로를 달리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이도 에린 공수 놈이 차를 세우더니 학생을 무조건 끌어내립디다. 내가 으째서 내 손님인 학생을 그러냐고 항의했더니 무조건 주먹이 날라옵디다. 내 이마 쪼깐 보쑈.”
“아이고메, 나는 한 나절 동안 연행됐다가 영업을 죽썼당께. 일할 맛이 나지 않그만.”
“택시기사덜이 만만헌 홍어 거시기로 보이는 모냥이여.”
박병규를 새벽에 태웠던 기사도 한 마디 했다.
“요로크롬 당허고 있을 수만은 ?제잉. 우리도 한 번 뭉쳐보믄 으쩌겄소?”
그러자 나이 든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덜 ? 명이 뭉친다고 되간디. 지금부터라도 돌아댕김시로 기사덜끼리 모이자고 소문을 퍼뜨러야제.”
해장국밥이 나오자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숟가락질을 했다. 밥 먹는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끼 밥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먹어야 했다. 적어도 식사시간만큼은 공수부대원에게 당한 수모를 잊고 해장국밥이라도 편하게 넘기고 싶었다.
화순 너릿재를 넘어와 불로동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잔 박래풍과 김용호는 아침 9시쯤에야 눈을 떴다. 어제 오후 광주천 천변도로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돌팔매질을 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그렇다고 박래풍은 여관방에 마냥 누워 있기가 왠지 찜찜했다. 공수부대원을 혼내 주겠다고 구두닦이 일을 접은 채 광주에 왔기 때문이었다. 박래풍은 이불을 두 발로 밀어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점심 때까정 한 번 더 싸와보자.’
농사꾼 김용호는 여전히 큰 몸집을 이리저리 굴리며 뭉그적댔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박래풍이 큰 대자로 누워 있는 김용호를 발로 찼다.
“야, 나가자. 돌멩이를 한 번 더 들어보자. 심들지만 또 던져보자.”
“래풍아, 한숨 더 자자. 싸와봤자 우리만 손해보겄드라. 우리 심으론 역부족이여.”
“무신 소리여. 광주를 깔보는 공수놈덜 손 쪼깐 보자고 넘어온 것 아니냐.”
“여관비 써감시롱 우리가 요로코름 있는 것이 맞는지 모르겄다야.”
“하루살이맨치로 사는 내가 돈 까묵어감시롱 싸우자니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싸와보자.”
“내 생각으론 우리가 이길 수 ?는 싸움이어야. 근디 니 말대로 해보고 안 되믄 으짤래?”
“벨 수 있냐. 너릿재를 넘어가서 구두나 닦고 살아야제.”
“좋다. 나가 불자.”
불로동은 도청 뒤편의 동네로 금남로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덩치가 큰 김용호는 행동은 느리지만 머리회전은 빨랐다. 게다가 힘이 셌다. 박래풍보다 돌멩이를 훨씬 더 멀리 던졌다. 두 사람은 시위대 무리가 웅성거리는 충장파출소 쪽으로 나갔다. 파출소는 문이 잠가져 있었다. 시위대 청년 몇 사람은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리어카에 주먹밥을 가지고 나와 나눠주는데 양동시장과 남광주시장, 대인시장 상인들이었다. 박래풍과 김용호는 얼른 새치기를 했다. 그러자 카빈총을 든 시위청년이 가로막았다.
“어허, 질서를 지켜붑시다. 밥은 충분헌께.”
“총은 으디서 생겼소. 빈 총이지라?”
“파출소를 털어부렀지라. 경찰이 가지가란 듯이 슬그머니 피해붑디다.”
몸집이 마른 한 청년이 두 사람을 자기 앞으로 세워주었다. 박래풍처럼 몸집이 작고 얼굴은 어려서부터 거친 일을 해온 듯 마른 과일처럼 부석부석했다.
“고맙소. 형씨는 으째서 여그 나왔소?”
“쩌그 우게 있는 귀빈식당서 일하기로 했는디 가본께 문을 닫아부렀습디다. 원래 일하던 중흥동 호남식당은 주인이 문을 닫자고 허고. 돈을 받아야 집으로 갈 거 아니요. 긍께 시내를 뺑뺑 돌고 있지라.”
“형편이 비슷헌디 같이 댕깁시다.”
“나는 김선문이라고 헌디 송정리서 왔그만요.”
시위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명을 쓰는데 김선문은 솔직하게 이름을 밝혔다. 두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은 주먹밥으로 아침끼니를 해결한 뒤 가톨릭센터 앞으로 나갔다. 시위 분위기는 18일, 19일과 달랐다. 시위대 무리가 시위군중으로 변했고, 투석전은 좀 더 격렬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저지선은 견고했다. 시위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밀고 올라가보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단 1미터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를 쫓아와 매가 병아리 낚아채듯 몇 사람씩을 잡아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하면서 질질 끌고 갔다.
세 사람은 최루탄이 연달아 터지자 골목길로 피했다. 공수부대 뒤에서 전경이 쏘는 페퍼포그였다. 세 사람이 어느 집 철대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여주인이 찬물을 떠왔다. 김선문은 한 그릇을 혼자 다 비워버렸다. 여주인이 다시 물을 가져왔다. 김선문이 말했다.
“난 첨에는 군인들이 왔을 때 박수를 쳤지라. 학생맨치로 젊은 군인들이 보기 좋더라고. 근디 뭣이여, 충장로 4가였그만. 남자 여자가 팔짱을 끼고 가는디 느닷없이 공수가 남자를 잡을라 헌께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는 멍허니 그 자리에 서 있드라고. 공수가 여자 머리채를 잡고 돌려버린께 툭 나가떨어지등마. 그라고는 진압봉으로 한 30대를 때려부러요. 여자가 입에서 거품을 벌벌 흘려부러. 그래갖고 보는 사람들이 모다 맛이 가버렸제. 그때부터 나도 정신이 이상해진 거지. 돌멩이를 들었거든.”
박래풍도 한 마디 했다.
“나는 화순터미널서 버스승객덜헌티 광주 얘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너릿재를 넘어왔소.”
“아따, 래풍이는 여그 온 이유가 거창하그만잉. 하하.”
“나는 그냥 송정리 집으로 갈라고 해도 공수새끼덜이 네 군데를 다 막아불고 있드랑께.”
네 군데란 광주에서 외각으로 드나드는 길목을 말했다. 송정리는 화정동, 담양은 서방, 화순은 지원동, 동운동은 장성 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뭐시기, 지원동도 막아부렀소?”
“어저께 트럭 타고 댕김시롱 다 확인했지라. 공수덜이 바리케이트까지 치고 있습디다.”
김용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농사철인디 큰일 나부렀네!”
“주민등록증은 있소?”
박래풍과 김용호가 동시에 말했다.
“그런 거 안 가지고 댕기지라.”
“주민증이 ?으믄 길목에 있는 공수덜이 쏴죽여분다는 말도 있습디다.”
“아이고메, 화순으로 넘어가기는 디질지 모른께 틀려부렀네잉.”
김용호가 낙담한 듯 철대문에 나자빠졌다. 철대문이 쿵 소리를 내자 여주인이 놀라 뛰어나왔다. 박래풍은 김용호를 위로했다.
“친구야, 우리는 광주에 남아서 싸우라는 운명인갑다. 으쩔 것이냐.”
세 사람은 물을 준 여주인에게 미안해하며 중앙국민학교 붉은 벽돌담을 타고 시민관 쪽으로 올라갔다. 시민관 앞길도 계림동과 소방서 방향에서 몰려온 시민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세 사람은 기분도 전환할 겸 전대스쿨버스에 올라탔다. 유리창은 모두 박살나 있었다. 먼저 탄 사람에게 물어보니 공수부대가 한 짓이 아니라 유리조각에 다치지 않기 위해 청년들이 먼저 깨버렸다고 말했다. 버스 안에는 빵과 우유가 서너 박스 있었다. 버스가 지나갈 때 슈퍼에서 내준 먹을거리였다. 세 사람은 점심끼니로 빵과 우유를 허둥지둥 먹었다. 버스 운전수 옆의 앞자리에는 초록색 티에 청바지를 입은 여대생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전에 여대생이 내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죽점퍼를 입은 청년이 태극기를 건네받더니 깨진 유리창 밖으로 팔을 뻗었다. 박래풍은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자 콧등이 찡했다.
“워메! 멋져부러야.”
스쿨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각목으로 창턱을 치면서 구호를 외쳤다. 세 사람도 따라서 복창했다. 스쿨버스는 변두리로 나가 시민들을 모아 노동청, MBC방송국, 시청 쪽으로 실어 나르는 모양이었다.
중앙고속터미널 맞은편의 해장국밥집은 점심때가 더 바빴다. 기사들 1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택시기사들도 뭉쳐 싸우자고 했는데 한 기사가 뜻밖에 호응이 좋다고 말했다.
“아칙에 우리덜이 한 얘기가 시내 기사식당으로 쫙 퍼졌는디 다덜 한 번 뭉쳐보자고 허는 모냥이요.”
“으디선가 모다 만나야 허는디 공수 눈에 안 띄는 곳이 좋겄제잉.”
“성님, 무등경기장서 모였다가 도청으로 가믄 되겄지라.”
“아이고메, 거그가 딱 좋겄네. 점심 후에는 손님도 ?고 헌께 2시쯤 모이믄 으쩐가?”
택시기사들은 늦은 점심을 한 뒤 후닥닥 나갔다. 다른 기사식당에도 전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택시기사들의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시위청년 학생들을 잔인하게 몰아붙이는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들 분개했던 것이다.
삼화다방 주방장 염동유는 오후 3시쯤 자신이 일하는 삼화다방을 나와 시외버스공용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양지다방으로 선배를 찾아갔다. 삼화다방이 오후에 셔터를 내린 것은 주인이 영업을 그만하자고 해서였다. 염동유는 선배와 아무래도 광주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구경이나 하자고 양지다방 문을 밀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났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청년 학생들을 향해 진압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염동유는 선배를 따라서 기다시피 다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어저께 다방 손님덜이 공수가 시민덜을 다 죽인다고 허는디도 안 믿었는디 사실인갑소야.”
“여그서도 손님덜헌티 들었그만. 공수덜이 청년덜을 개패듯 닦달헌다고 허대.”
“선배, 우리가 시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갑소야.”
밖이 조용해진 1시간쯤 뒤 염동유와 선배는 다시 다방을 나왔다. 밖은 살벌했다. 다방 옆의 정육점 진열장 유리가 조각조각 깨져 있었다. 시외공용버스터미널 광장에는 40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진압대기 중이었다. 노인들이 나서서 공수부대원들에게 항의했다. 한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노인들의 삿대질에도 물러서지 않다가 중령이 지시하자 광주역 쪽으로 철수했다. 시민 학생들이 노인들에게 박수로 응원했다.
“어르신덜이 최곱니다!”
염동유와 선배는 시위대를 따라 도청 쪽으로 걸어서 갔다. 염동유가 금남로 4가 건널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수창국민학교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수십 대의 자동차들이 보였다. 자동차들 대부분은 임동 길을 따라오고 있고 일부는 광주역 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염동유는 가슴을 벌렁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차량시위였다. 자동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느리게 오고 있었는데 염동유는 너무 흥분돼 선배가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시민들을 따라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차량시위 맨 앞은 대형버스와 대형트럭, 그 뒤는 택시들이 뒤따랐다. 금남로 양쪽 인도에 들어찬 시민들은 차량행렬을 따라 도청 쪽으로 걸었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시민과 청년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8일 이후 가장 많이 운집한 인파였다.
“와아! 와아! 우리 용사덜 잘헌다. 이기자, 이겨불자!”
대형버스와 화물차에는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각목을 들고 차를 두들기며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시민 살려내라.’ 등등의 구호를 외쳤다. 차량행렬이 도청 앞 분수대에서 1백여 미터쯤 떨어진 동구청에 이르렀을 때였다. 염동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웃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손을 들어 답했다. 화순에서 밤에 술 한 잔 했던 박래풍이었다. 그러나 인파에 떠밀려 만날 수는 없었다. 박래풍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차량시위에 대형버스 4대와 화물차 8대, 2백대의 택시가 가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인도에서 내려와 차량 사이사이를 메웠다. 공수부대원들과 전경들은 당황했다. 페퍼포그를 발사하면서 도청 앞에서 버텼다. 잠시 후 11공수여단 61대대와 62대대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편성 공격해 버스 유리창을 깨부순 뒤 차 안에 최루탄을 던지며 운전사와 시위시민들을 끌어냈다. 현장에 붉은 피가 뿌려졌다. 그래도 시민군중은 공수부대 저지선 20미터까지 나아갔다. 이제는 공수부대원들과 시민들이 육박전을 벌였다. 시민군중 가운데 부상자가 수십 명 속출했다. 오후 7시 45분쯤에는 전투용 장갑차가 나타났다. 공수부대는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듯 전일빌딩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도로변의 장식용 대형화분으로 막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고 밀리는 공방은 밤 9시까지 계속됐다. 마침내 시위군중이 노동청 쪽과 금남로, 충장로 등 도청 광장을 사면으로 포위했다. 이에 공수부대와 전경은 페퍼포그을 발사하며 필사적으로 시위군중의 도청 접수를 막았다. 그러자 시위시민들은 금남로에서의 도청 진입을 포기하고 노동청 앞길로 광주고속버스 10여대를 가지고 왔다. <계속>
“아이고메, 나는 한 나절 동안 연행됐다가 영업을 죽썼당께. 일할 맛이 나지 않그만.”
박병규를 새벽에 태웠던 기사도 한 마디 했다.
“요로크롬 당허고 있을 수만은 ?제잉. 우리도 한 번 뭉쳐보믄 으쩌겄소?”
그러자 나이 든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덜 ? 명이 뭉친다고 되간디. 지금부터라도 돌아댕김시로 기사덜끼리 모이자고 소문을 퍼뜨러야제.”
화순 너릿재를 넘어와 불로동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잔 박래풍과 김용호는 아침 9시쯤에야 눈을 떴다. 어제 오후 광주천 천변도로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돌팔매질을 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그렇다고 박래풍은 여관방에 마냥 누워 있기가 왠지 찜찜했다. 공수부대원을 혼내 주겠다고 구두닦이 일을 접은 채 광주에 왔기 때문이었다. 박래풍은 이불을 두 발로 밀어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점심 때까정 한 번 더 싸와보자.’
농사꾼 김용호는 여전히 큰 몸집을 이리저리 굴리며 뭉그적댔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박래풍이 큰 대자로 누워 있는 김용호를 발로 찼다.
“야, 나가자. 돌멩이를 한 번 더 들어보자. 심들지만 또 던져보자.”
“래풍아, 한숨 더 자자. 싸와봤자 우리만 손해보겄드라. 우리 심으론 역부족이여.”
“무신 소리여. 광주를 깔보는 공수놈덜 손 쪼깐 보자고 넘어온 것 아니냐.”
“여관비 써감시롱 우리가 요로코름 있는 것이 맞는지 모르겄다야.”
“하루살이맨치로 사는 내가 돈 까묵어감시롱 싸우자니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싸와보자.”
“내 생각으론 우리가 이길 수 ?는 싸움이어야. 근디 니 말대로 해보고 안 되믄 으짤래?”
“벨 수 있냐. 너릿재를 넘어가서 구두나 닦고 살아야제.”
“좋다. 나가 불자.”
불로동은 도청 뒤편의 동네로 금남로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덩치가 큰 김용호는 행동은 느리지만 머리회전은 빨랐다. 게다가 힘이 셌다. 박래풍보다 돌멩이를 훨씬 더 멀리 던졌다. 두 사람은 시위대 무리가 웅성거리는 충장파출소 쪽으로 나갔다. 파출소는 문이 잠가져 있었다. 시위대 청년 몇 사람은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리어카에 주먹밥을 가지고 나와 나눠주는데 양동시장과 남광주시장, 대인시장 상인들이었다. 박래풍과 김용호는 얼른 새치기를 했다. 그러자 카빈총을 든 시위청년이 가로막았다.
“어허, 질서를 지켜붑시다. 밥은 충분헌께.”
“총은 으디서 생겼소. 빈 총이지라?”
“파출소를 털어부렀지라. 경찰이 가지가란 듯이 슬그머니 피해붑디다.”
몸집이 마른 한 청년이 두 사람을 자기 앞으로 세워주었다. 박래풍처럼 몸집이 작고 얼굴은 어려서부터 거친 일을 해온 듯 마른 과일처럼 부석부석했다.
“고맙소. 형씨는 으째서 여그 나왔소?”
“쩌그 우게 있는 귀빈식당서 일하기로 했는디 가본께 문을 닫아부렀습디다. 원래 일하던 중흥동 호남식당은 주인이 문을 닫자고 허고. 돈을 받아야 집으로 갈 거 아니요. 긍께 시내를 뺑뺑 돌고 있지라.”
“형편이 비슷헌디 같이 댕깁시다.”
“나는 김선문이라고 헌디 송정리서 왔그만요.”
시위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명을 쓰는데 김선문은 솔직하게 이름을 밝혔다. 두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은 주먹밥으로 아침끼니를 해결한 뒤 가톨릭센터 앞으로 나갔다. 시위 분위기는 18일, 19일과 달랐다. 시위대 무리가 시위군중으로 변했고, 투석전은 좀 더 격렬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저지선은 견고했다. 시위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밀고 올라가보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단 1미터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를 쫓아와 매가 병아리 낚아채듯 몇 사람씩을 잡아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하면서 질질 끌고 갔다.
세 사람은 최루탄이 연달아 터지자 골목길로 피했다. 공수부대 뒤에서 전경이 쏘는 페퍼포그였다. 세 사람이 어느 집 철대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여주인이 찬물을 떠왔다. 김선문은 한 그릇을 혼자 다 비워버렸다. 여주인이 다시 물을 가져왔다. 김선문이 말했다.
“난 첨에는 군인들이 왔을 때 박수를 쳤지라. 학생맨치로 젊은 군인들이 보기 좋더라고. 근디 뭣이여, 충장로 4가였그만. 남자 여자가 팔짱을 끼고 가는디 느닷없이 공수가 남자를 잡을라 헌께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는 멍허니 그 자리에 서 있드라고. 공수가 여자 머리채를 잡고 돌려버린께 툭 나가떨어지등마. 그라고는 진압봉으로 한 30대를 때려부러요. 여자가 입에서 거품을 벌벌 흘려부러. 그래갖고 보는 사람들이 모다 맛이 가버렸제. 그때부터 나도 정신이 이상해진 거지. 돌멩이를 들었거든.”
박래풍도 한 마디 했다.
“나는 화순터미널서 버스승객덜헌티 광주 얘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너릿재를 넘어왔소.”
“아따, 래풍이는 여그 온 이유가 거창하그만잉. 하하.”
“나는 그냥 송정리 집으로 갈라고 해도 공수새끼덜이 네 군데를 다 막아불고 있드랑께.”
네 군데란 광주에서 외각으로 드나드는 길목을 말했다. 송정리는 화정동, 담양은 서방, 화순은 지원동, 동운동은 장성 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뭐시기, 지원동도 막아부렀소?”
“어저께 트럭 타고 댕김시롱 다 확인했지라. 공수덜이 바리케이트까지 치고 있습디다.”
김용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농사철인디 큰일 나부렀네!”
“주민등록증은 있소?”
박래풍과 김용호가 동시에 말했다.
“그런 거 안 가지고 댕기지라.”
“주민증이 ?으믄 길목에 있는 공수덜이 쏴죽여분다는 말도 있습디다.”
“아이고메, 화순으로 넘어가기는 디질지 모른께 틀려부렀네잉.”
김용호가 낙담한 듯 철대문에 나자빠졌다. 철대문이 쿵 소리를 내자 여주인이 놀라 뛰어나왔다. 박래풍은 김용호를 위로했다.
“친구야, 우리는 광주에 남아서 싸우라는 운명인갑다. 으쩔 것이냐.”
세 사람은 물을 준 여주인에게 미안해하며 중앙국민학교 붉은 벽돌담을 타고 시민관 쪽으로 올라갔다. 시민관 앞길도 계림동과 소방서 방향에서 몰려온 시민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세 사람은 기분도 전환할 겸 전대스쿨버스에 올라탔다. 유리창은 모두 박살나 있었다. 먼저 탄 사람에게 물어보니 공수부대가 한 짓이 아니라 유리조각에 다치지 않기 위해 청년들이 먼저 깨버렸다고 말했다. 버스 안에는 빵과 우유가 서너 박스 있었다. 버스가 지나갈 때 슈퍼에서 내준 먹을거리였다. 세 사람은 점심끼니로 빵과 우유를 허둥지둥 먹었다. 버스 운전수 옆의 앞자리에는 초록색 티에 청바지를 입은 여대생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전에 여대생이 내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죽점퍼를 입은 청년이 태극기를 건네받더니 깨진 유리창 밖으로 팔을 뻗었다. 박래풍은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자 콧등이 찡했다.
“워메! 멋져부러야.”
스쿨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각목으로 창턱을 치면서 구호를 외쳤다. 세 사람도 따라서 복창했다. 스쿨버스는 변두리로 나가 시민들을 모아 노동청, MBC방송국, 시청 쪽으로 실어 나르는 모양이었다.
중앙고속터미널 맞은편의 해장국밥집은 점심때가 더 바빴다. 기사들 1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택시기사들도 뭉쳐 싸우자고 했는데 한 기사가 뜻밖에 호응이 좋다고 말했다.
“아칙에 우리덜이 한 얘기가 시내 기사식당으로 쫙 퍼졌는디 다덜 한 번 뭉쳐보자고 허는 모냥이요.”
“으디선가 모다 만나야 허는디 공수 눈에 안 띄는 곳이 좋겄제잉.”
“성님, 무등경기장서 모였다가 도청으로 가믄 되겄지라.”
“아이고메, 거그가 딱 좋겄네. 점심 후에는 손님도 ?고 헌께 2시쯤 모이믄 으쩐가?”
택시기사들은 늦은 점심을 한 뒤 후닥닥 나갔다. 다른 기사식당에도 전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택시기사들의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시위청년 학생들을 잔인하게 몰아붙이는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들 분개했던 것이다.
삼화다방 주방장 염동유는 오후 3시쯤 자신이 일하는 삼화다방을 나와 시외버스공용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양지다방으로 선배를 찾아갔다. 삼화다방이 오후에 셔터를 내린 것은 주인이 영업을 그만하자고 해서였다. 염동유는 선배와 아무래도 광주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구경이나 하자고 양지다방 문을 밀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났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청년 학생들을 향해 진압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염동유는 선배를 따라서 기다시피 다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어저께 다방 손님덜이 공수가 시민덜을 다 죽인다고 허는디도 안 믿었는디 사실인갑소야.”
“여그서도 손님덜헌티 들었그만. 공수덜이 청년덜을 개패듯 닦달헌다고 허대.”
“선배, 우리가 시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갑소야.”
밖이 조용해진 1시간쯤 뒤 염동유와 선배는 다시 다방을 나왔다. 밖은 살벌했다. 다방 옆의 정육점 진열장 유리가 조각조각 깨져 있었다. 시외공용버스터미널 광장에는 40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진압대기 중이었다. 노인들이 나서서 공수부대원들에게 항의했다. 한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노인들의 삿대질에도 물러서지 않다가 중령이 지시하자 광주역 쪽으로 철수했다. 시민 학생들이 노인들에게 박수로 응원했다.
“어르신덜이 최곱니다!”
염동유와 선배는 시위대를 따라 도청 쪽으로 걸어서 갔다. 염동유가 금남로 4가 건널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수창국민학교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수십 대의 자동차들이 보였다. 자동차들 대부분은 임동 길을 따라오고 있고 일부는 광주역 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염동유는 가슴을 벌렁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차량시위였다. 자동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느리게 오고 있었는데 염동유는 너무 흥분돼 선배가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시민들을 따라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차량시위 맨 앞은 대형버스와 대형트럭, 그 뒤는 택시들이 뒤따랐다. 금남로 양쪽 인도에 들어찬 시민들은 차량행렬을 따라 도청 쪽으로 걸었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시민과 청년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8일 이후 가장 많이 운집한 인파였다.
“와아! 와아! 우리 용사덜 잘헌다. 이기자, 이겨불자!”
대형버스와 화물차에는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각목을 들고 차를 두들기며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시민 살려내라.’ 등등의 구호를 외쳤다. 차량행렬이 도청 앞 분수대에서 1백여 미터쯤 떨어진 동구청에 이르렀을 때였다. 염동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웃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손을 들어 답했다. 화순에서 밤에 술 한 잔 했던 박래풍이었다. 그러나 인파에 떠밀려 만날 수는 없었다. 박래풍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차량시위에 대형버스 4대와 화물차 8대, 2백대의 택시가 가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인도에서 내려와 차량 사이사이를 메웠다. 공수부대원들과 전경들은 당황했다. 페퍼포그를 발사하면서 도청 앞에서 버텼다. 잠시 후 11공수여단 61대대와 62대대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편성 공격해 버스 유리창을 깨부순 뒤 차 안에 최루탄을 던지며 운전사와 시위시민들을 끌어냈다. 현장에 붉은 피가 뿌려졌다. 그래도 시민군중은 공수부대 저지선 20미터까지 나아갔다. 이제는 공수부대원들과 시민들이 육박전을 벌였다. 시민군중 가운데 부상자가 수십 명 속출했다. 오후 7시 45분쯤에는 전투용 장갑차가 나타났다. 공수부대는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듯 전일빌딩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도로변의 장식용 대형화분으로 막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고 밀리는 공방은 밤 9시까지 계속됐다. 마침내 시위군중이 노동청 쪽과 금남로, 충장로 등 도청 광장을 사면으로 포위했다. 이에 공수부대와 전경은 페퍼포그을 발사하며 필사적으로 시위군중의 도청 접수를 막았다. 그러자 시위시민들은 금남로에서의 도청 진입을 포기하고 노동청 앞길로 광주고속버스 10여대를 가지고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