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찬란한 문명 꽃피운 광주·전남 고대사 재조명
2020년 01월 02일(목) 00:00
일본서기 ‘369년 백제 병합설’에 마한史 잘못 해석
1996년 나주 복암리 3호분 발굴로 실체규명 전기 마련
석실서 4기 옹관 발굴…독립적 사회·독자적 문화 방증
올바른 역사 정립 필요…태동과 소멸의 과정 24회 연재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최근 가야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함께 마한이 주목되고 있다. 가야와 마한은 서로 닮은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가야는 통합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나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신라에 병합된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한 역시 여러 소국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하나 백제에 병합됐다.

고려시대에 쓰여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마한과 가야가 우리 고대사에서 의미 있게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를 없애고 말았다. 특히 마한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에 의해 일찌기 정복된 것으로 서술했다.

다행히 최근 30여년 새 조사가 진행돼온 수 많은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가야와 마한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기는 전기가 됐다. 가야 지역의 조사, 연구에서는 왜곡으로 점철됐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철회하게 만들었고 마한 지역의 조사, 연구에서는 마한을 이해하지 못하면 백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출도 금동관


◇왜 마한인가=마한을 대표하는 유적은 나주 반남고분군이며 1917년 겨울,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한국 여느 고분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조사단의 도굴과 다름 없는 발굴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쓰이 세이이쓰가 주도했던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의 한 옹관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수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발굴 책임자였던 야쓰이 세이이쓰는 “고분들은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대 아마 왜인일 것이다”는 약식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 조악한 발굴은 전남지역 마한 역사가 왜곡되고 뒤틀리는 비운의 서막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한으로 대표되는 전남 고대사가 아직도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가 늘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한 ‘일본서기’를 토대로 전남지역 마한 제국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를 근초고왕 24년(369)년으로 보는 통설이 대표적이다. ‘369년 백제 병합설’은 전남지역 고대사의 맥이 4세기에 끊겼다는 역사적 경계선이 돼, 전남 고대사의 대부분을 백제에 수렴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찬란한 영산강유역 고분문화 등 전남 고대사의 뿌리가 백제의 지류이거나 영향에 놓여있다는 식의 해석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마한사의 핵심 문제는=‘369년 백제 병합설’은 이병도 박사의 견해다. 이를 바탕으로 마한 독자적 문화의 아이콘인 5세기대 대형 옹관묘를 백제의 간접지배를 받았던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보았고, 5세기 후엽부터 축조되기 시작했던 석실묘는 직접지배를 위해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남긴 것이라고 인식해 왔다.

하지만 ‘369년 백제 병합설’의 근거가 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는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서기’의 연대로는 249년에 해당하지만 백제와 관련된 많은 기사들을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비교하면 무려 120년 차이가 난다. 이같은 연대 차이 때문에 연대관에 대한 논란을 포함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라고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제기되는 기사이다. 일본에서도 그 한계와 문제점에 공감하는 학자가 대다수일 정도임에도 ‘369년 백제 병합설’은 아직도 우리 교과서에 건재하고 있다.

중국 역사기록 가운데에는 마한의 역사가 선명하게 수록돼 있는 자료가 있다. 3세기 중엽경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은 마한 사회를 54개 소국으로 수록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그 공간적 범위는 경기, 충청, 전라지역으로 보는 게 공통된 견해다. 양나라 때 제작된 양직공도(梁職貢圖)는 마한의 실체와 존속시기를 기록한 스모킹 건이다. 양직공도는 6세기 초 백제 사신의 양나라 행차를 글과 그림으로 수록한 것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양직공도에 등장하는 백제 방소국(旁小國) 기사에는 521년 당시까지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던 마한 소국들이 등장한다. 지미(止迷), 마련(麻連), 하침라(下枕羅) 등은 전남지역에 해당하는 소국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369년 백제 병합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영산강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옹관


◇마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고고학계는 광주·전남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토대로 문헌사에서 한계를 드러낸 마한 실체규명의 전기를 마련했다. 1996년 나주 복암리 3호분 발굴이 대표적이다. 5세기 말에 조성됐던 석실에서 4기의 옹관이 발굴된 것이다. 이는 4세기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됐다는 설을 뒤집는 역사적 자료로 평가됐다. 즉, 마한사회 지배를 위해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라면 굳이 마한을 대표하는 옹관을 석실 안에 쓸리 없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암리 3호분은 42기의 목관, 옹관, 석실, 석곽으로 구성된 친족묘라는 사실까지 확인됐다. 이는 6세기까지 마한사회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남지역 마한이 독립적 사회와 독자적 문화를 이룩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기관이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다. 광주박물관에 이어 광주·전남지역에 두번째로 들어선 국립나주박물관도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고대문화와 관련된 핵심적인 두 국가기관이 함께 있는 곳은 경주, 부여, 창원, 나주 뿐이다. 각각 신라, 백제, 가야, 마한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국가기관이다.

전남지역 마한 사회가 백제의 지배와 거리가 있음을 증명하는 고고학 자료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산강유역에 집중돼 있는 장고형 고분은 5∼6세기에 존속했던 왜계양식 무덤이다. 백제의 지배를 받은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고분이다. 지난 2006년 전남대박물관 조사단(단장 임영진 전남대 교수)은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에서 마한사의 획을 긋는 발굴을 했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갑옷과 투구 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뿐만 아니라 왜와 등거리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한사 정리의 필요성=최근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마한에 대한 학설과 해설, 주장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백제 병합시기, 마한 제국의 위치, 고분 피장자의 성격, 왜(倭)와의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아직도 ‘369년 백제 병합설’에 갇혀 마한을 해석함으로써 학문적 공감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 상식으로도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이 때문에 마한에 대한 ‘과열’은 되레 마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장애가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 체계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같은 실정을 감안해 광주일보는 마한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고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가 최근까지 발굴성과와 연구결과 등을 바탕으로 마한의 태동부터 소멸까지 24회에 걸쳐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독자들에게는 임영진 교수의 통찰과 30년에 걸친 연구가 응결된 고고학의 프리즘을 통해 마한 뿐만 아니라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광주·전남 고대사의 뿌리인 마한을 조명하는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윤영기 기자 penfoot@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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