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행순 전남대 명예교수] 50년 전 유학 풍경
2019년 06월 19일(수) 04:50
반세기 전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미국은 장학금을 주면서 유학생을 초청하기도 했다. 한국 유학생들이 등록금을 자비로 낸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 강국이다. 미국 장학금 받기가 수월치 않다고 듣는다. 상황이 바뀌어 아시아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다.

필자는 196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어느 날 대학 본부에 미국 테네시 주의 한 대학으로부터 교환 학생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등록금 면제에 1년간 기숙사비를 전액 지원하고 항공료만 본인 부담이었다.

그 시절, 군 미필 남학생들은 해외여행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경쟁자가 많지 않았다. 그간의 성적, 필기, 면접 등의 선발 과정을 거쳐 유학 기회를 얻었다. 입학 관련 모든 절차는 양쪽 대학에서 처리해 주었다.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았지만 국내 절차가 까다로웠다.

현재의 교육부를 그때는 문교부라고 했다. 문교부가 주관하는 유학 자격 시험이 일 년에 두 번 있었다. 영어와 국사 시험에 합격해야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영어 시험은 바로 합격하였으나 국사는 떨어졌다. 일단 시험 경향을 파악했으니 국사 문제와 답안을 100개 쯤 만들어 달달 외워서 두 번째에 합격하였다.

마지막 관문으로 출국 전에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해외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내용과 이념 교육이었다.

드디어 모든 절차를 마치고 1969년 6월 19일, 정확히 50년 전 오늘, 미화 100달러를 지니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지금은 해외에 나갈 때 소지할 수 있는 외화 한도가 1만 달러지만 그때는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하여 100달러였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외환 보유액은 지난 4월 말 기준 4040억 3000만 달러지만 50년 전에는 5억 5000만 달러였다.

그때의 김포국제공항 풍경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과 사뭇 달랐다. 가족은 물론 많은 일가친척들이 공항에 나와서 환송해 주었다. 기념 사진을 찍고 잘 다녀오라며 격려와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출국하는 아들이나 남편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떠나는 이들은 몇 발자국 가다가 돌아서고 또 돌아서서 손을 흔들고 환송객들 역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가슴 설레며 유학길에 올랐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세기가 흘렀다. 네팔에 살다가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두 나라의 차이를 느낀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느꼈던 그 감정과 충격이 떠오른다.

아쉬운 것은 50년 전, 그렇게 어려울 때에도 청년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지 않았다. 네팔 청년들에게 우리나라는 기회의 땅, 천국 다음인데 정작 우리는 ‘지옥’이라니?

우리 젊은이들이 국내에서 좁은 문을 놓고 경쟁하다 좌절하지 말고 국외에서 기회를 찾는 용기를 보고 싶다. 요즘에는 선진국 유학만 고집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네팔 카트만두대학교 빙하학과(Glaciology Department)에는 여러 나라 학생들이 유학을 온다. 등록금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하다.

교환 학생으로 네팔에 온 우리나라 청년이 있었다. 여행도 하고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좋은 성적을 받고 한국에 돌아가더니 졸업 후에 필리핀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개발 도상국에 해외 봉사단으로 일하는 기회도 많다. 네팔에 온 젊은 봉사단원들은 2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고 현지어를 상당 수준 습득하는 것을 본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회장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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