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진실을 찾아서] <2> 5·18 왜곡의 역사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죽여도 좋다” 대대장 명령에 발포 … 軍, 기록 없애고 치밀하게 왜곡
APC 장갑차서 캘리버50 발포…확인사살까지 자행
80위원회·511위원회 꾸려 문서·영상 등 자료 소각
2019년 04월 25일(목) 00:00
5월의 진실을 찾는 여정은 가해자인 신군부와 피해자인 시민이 벌이는 진실공방의 과정이었다. 1980년 5월의 체험에 기반한 시민들의 기억과 증언은 명백한 진실의 증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정되었다. 객관성을 이유로 시민들의 기억과 증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증거를 요구했다. 가해자인 신군부는 시민들이 기억·증언하는 그런 사실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신군부는 군 기록을 제시했다.

신군부가 제시한 군 기록에는 시민들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사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실공방에서 기록이라는 물증을 제시하며,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더구나 군이 작성하고 관리한 기록을 시민들의 기억보다 더 객관적인 것처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존재했다.

◇군 기록의 은폐와 조작, 가해를 피해로 뒤바꾸기

5·18관련 군 기록은 1980년 5월 당시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국군보안사령부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5·18관련 핵심자료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에서 따로 관리하면서, 문제소지가 없는 자료만 정통실(정보통신실)로 이관하여 존안 처리하였다. 이렇게 관리되던 보안사의 5·18자료는 1996년경 일괄 폐기되었다고 한다. 비서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핵심 자료는 감찰실장 입회하에 사령부 소각장에서 소각하고, 3처에서 이관한 합동수사본부 자료 등 종이 자료는 대한펄프 제지공장에서 정통실 간부 입회하에 용해 처리했다. 폐기과정에서 일부 자료가 남을까봐 소각하거나, 아예 종이의 원재료 형태인 펄프로 녹여버린 것이다.

보안사는 철저한 관리와 폐기과정을 거쳐서 문제 소지가 없다고 판단한 극히 일부의 자료만 5·18기록물로 남겼다. 5월 19일 광주에 파견된 11공수특전여단의 상황일지도 이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상황일지는 전투상보에 비해 각 시간대별로 군의 작전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렇지만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군은 현장 진압부대의 상황일지는 보존 연한이 경과하여 일괄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서 1, 1-2는 군이 폐기했다고 주장한 11공수여단의 상황일지이다. 문서 2와 3은 2017년 필자가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활동과정에서 발굴한 체험수기 원본 자료의 일부이다. 1985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작성된 체험수기에서 11공수의 상황일지로 추정되는 내용을 최초로 확인했지만 문서 2, 3처럼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군 기록물에서 1, 1-2와 같이 1980년 당시의 상황일지를 발견하면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진실과 함께 1980년 이후 군이 위·변조한 내용까지 확인되었다. 특히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서의 사격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관련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35대대가 동시에 공포를 사격 주춤한 폭도들 앞에서 61, 62, 63대대는 즉각 전열 재정비 APC로 하여 폭도들 APC가 계속 접근치 못하도록 CAL50을 사격토록 지시하고… 계엄군의 작전을 탐지키 위해 이때 1명의 폭도가 버스 1대를 몰고 돌진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서 다시 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 (판독 불가능)을 지시 그 자리에서 사살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음. 이후 폭도들은 감히 도청을 향해 돌진해오지 못하고 계속 500미터 이격된 가운데 APC를 이용 강습돌파작전을 감행할 의도임을 인지하고 폭도 APC가 움직일 때마다 계엄군 APC의 CAL50으로 위협사격을 실시했음”

새롭게 확인한 11공수여단의 상황일지에 따르면 계엄군은 5월 21일 시민들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는 물론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다. 또한 장갑차를 이용하여 위협사격을 실시하고, 도청 인근 고층 건물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고층 건물에 계엄군을 배치한 이유는 도청 앞 헬기장을 사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신군부는 5월 21일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가 자위권적 차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은폐해 왔던 상황일지에는 자위권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버스 1대가 질주하여 들어오고 있을 때 저건 죽여도 좋다는 대대장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옆에 있던 중대장이 어느 병사에게 실탄 1발을 주어 즉시 조준 사격 들어오던 뻐스를 쏘고 운전사는 비상구를 열고 내리다 쓰러졌음”이라는 군 기록은 당시의 사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군 문서 2와 3에서 확인되듯이 1985년과 1988년 군이 새로 작성한 상황일지에는 계엄군의 사격에 관한 내용이 모두 사라진다. 버스 운전기사를 사살하여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는 확인 사살의 내용은 사라지고 오히려 계엄군이 사격을 받은 것으로 위조한다. 1985년 기록에서는 문제의 버스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서 다시 나간 것으로 변조한다. 또한 APC(장갑차)의 CAL50 기관총으로‘폭도 APC‘가 움직일 때마다 사격을 했다는 내용은 1985년 기록에서는 지워지고, 1988년 기록에서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여 방어한 것으로 조작된다.

1980년 당시의 11공수 상황일지에 따르면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도 모자라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작성된 기록에서는 오히려 폭도의 사격을 받은 피해자로 탈바꿈한다.

◇5·18 왜곡의 주체, 80위원회와 511연구위원회

문서 1, 1-2,2, 3에서 알 수 있듯이 군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특정 시기에 따라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문서 1, 1-2와 같이 1980년 작성된 기록은 시민들이 목격한 당시의 상황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반면에 1985년과 1988년의 군 기록은 시민들의 기억과 증언은 물론 군이 기존에 작성한 기록과도 배치된다. 11공수의 상황일지의 사례를 통해 특정 시기에 군 기록이 체계적으로 은폐되고, 위·변조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1공수의 상황일지가 재 작성된 1985년과 1988년은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에서 5·18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범정부 차원의 대응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한 시기와 일치한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6월 국회질의 및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 5·18에 대한 사회각계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서 안전기획부 주관 하에 대응 조직을 결성했다. 대책회의는 5·18관련 모든 자료를 수합 정리하고, 백서 발간을 목표로 하여 군 문서 4와 같이 80위원회라는 실무위원회를 편성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5·18자료를 수집 재정리하는 것이었다. 11공수 상황일지가 은폐되고, 재작성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들 조직의 활동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5월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핵심 이슈로 등장한 5·18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회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원할 한 업무 수행을 위하여 실무위원회로 511연구위원회를 편성했다. 군 문서 5의 511연구위원회는 5·18자료의 수집과 정리, 주요 쟁점에 대한 대응 논리 개발을 담당했다.

따라서 향후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은 5·18관련 군 기록의 조직적 은폐와 위·변조에 관여한 5·18왜곡 조직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80위원회, 511연구위원회 등 왜곡 조직이 은폐하고 조작한 내용에 5·18의 실체적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hesal@hanmail.net

※다음 원고는 5월23일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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