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두목, 이백·두보에 비견되는 빼어난 시인
2019년 04월 23일(화) 00:00 가가
두목(杜牧. 803852)의 자는 목지로 경조 만년 출신이다. 통전을 저술한 재상 두우의 손자다. 이상은과 함께 만당 시대의 대표적 시인이다.
덕종 정원 19년(803) 명문 두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 두우 사촌형 두종 모두 재상을 역임했다. 어려서부터 시와 글을 잘 지었다. 태학박사 오무릉의 제자로 장안에서 공부했는데 그가 지은 아방궁부(阿房宮賦)로 일찍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진시황이 지은 장대한 아방궁의 모습을 뛰어난 필체로 묘사해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평가되었다. 문종 태화 2년(828) 진사에 급제해 홍문관교서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강서선흡관찰사 심전사를 거쳐 833년 회남절도사 우승유 밑에서 서기로 근무했다. 근무지인 양주는 강남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 술과 가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우승유는 지나친 향락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그가 감찰어사로 장안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간의 행적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처신에 더욱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후일 양주에서의 생활을 반성해 쓴 시가 유명한 유회(遺懷)다. 835년 감찰어사로 중앙에 잠시 복귀한 후 분사동도가 되어 낙양으로 옮겼다. 덕분에 감로지변의 실패에 따른 환관의 조정공신 숙청에서 처벌을 면하였다. 837년 눈이 멀게된 동생을 치료하고자 양주로 갔다. 다음해 복귀해 사훈원외랑 등의 직을 수행했다. 842년 이후 호북성 황주, 안휘성 지주, 저장성 목주 등 작은 마을의 자사를 지냈다. 무종 회창 연간에는 고공낭중, 지제고, 중서사인으로 봉직했다. 그는 중앙과 지방 직을 여러 차례 역임했지만 고위직에는 못 올랐다. 우이 당쟁이 심화되면서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고 할말은 하는 고집으로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852년 50세로 죽었다.
이상은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로 불릴 정도로 이백과 두보와 비교되었다. 시풍이 두보를 닮았다고 소두(小杜)로도 불렸다. 시중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가 뛰어났다. 낭만과 풍류가 넘치는 시가 많았다. 만당 시의 특징인 섬세함과 기교에 능했다. 반면에 평안하고 호방한 시풍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사실주의 보다는 인상주의적 작풍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 청명절은 음율과 정취가 아름다운 내용으로 평가받는다. “청명절에 가랑비 내려 길가는 사람의 애를 끓네. 주막이 어디인지 물으니 목동은 살구꽃 핀 마을을 가르키네”(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영화의 아름다운 한 장면처럼 한가로운 시골 마을의 정취가 듬뿍 느껴지는 시라 하겠다.
절강성 호주에서는 어린 소녀의 자태에 반해 청혼하였다. 소녀가 나이 어려 10년 뒤에 하기로 약조하였다. 그러나 장안으로 돌아간 후 10년 넘게 강남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재상에게 여러번 부탁한 끝에 호주태수로 부임했지만 14년의 세월이 흘러 소녀는 수년전에 시집을 갔다고 한다. 탄화(歎花)라는 시가 탄생한 배경이다. 반면에 호탕하고 우국충정을 노래한 시도 있다. 대표작 진회(秦淮)는 뛰어난 시적 기교와 함께 진지한 사회성을 잘 보여준다. “찬 강물 안개 그득 모래밭 달빛 가득하네. 야밤에 진회에 묵으니 술집 가까이 있네. 술집 여자는 망국의 한을 모르나. 강건너 들려오는 후정화 노래 소리.”(烟籠寒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시인으로서 주된 관심은 시의 표현 문제였다. 칠언절구에 집착해 기교적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애정을 노래한 시가 많지만 이상은과는 달리 감정 표현을 절제했다. 그는 번진의 위협과 북방 이민족의 변경 침략을 걱정하는 애국시인의 면모도 보여준다. 부국강병을 통해 잃은 강토를 되찾고 왕조를 번성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회수와 장강은 당 왕조의 생명선”이라며 국방과 치안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안보와 용병에 관심이 많아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사회는 무너져 내리고 앞날은 불투명한 만당 시대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심약한 시인의 한계를 노정한다.
덕종 정원 19년(803) 명문 두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 두우 사촌형 두종 모두 재상을 역임했다. 어려서부터 시와 글을 잘 지었다. 태학박사 오무릉의 제자로 장안에서 공부했는데 그가 지은 아방궁부(阿房宮賦)로 일찍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진시황이 지은 장대한 아방궁의 모습을 뛰어난 필체로 묘사해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평가되었다. 문종 태화 2년(828) 진사에 급제해 홍문관교서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강서선흡관찰사 심전사를 거쳐 833년 회남절도사 우승유 밑에서 서기로 근무했다. 근무지인 양주는 강남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 술과 가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우승유는 지나친 향락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그가 감찰어사로 장안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간의 행적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처신에 더욱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후일 양주에서의 생활을 반성해 쓴 시가 유명한 유회(遺懷)다. 835년 감찰어사로 중앙에 잠시 복귀한 후 분사동도가 되어 낙양으로 옮겼다. 덕분에 감로지변의 실패에 따른 환관의 조정공신 숙청에서 처벌을 면하였다. 837년 눈이 멀게된 동생을 치료하고자 양주로 갔다. 다음해 복귀해 사훈원외랑 등의 직을 수행했다. 842년 이후 호북성 황주, 안휘성 지주, 저장성 목주 등 작은 마을의 자사를 지냈다. 무종 회창 연간에는 고공낭중, 지제고, 중서사인으로 봉직했다. 그는 중앙과 지방 직을 여러 차례 역임했지만 고위직에는 못 올랐다. 우이 당쟁이 심화되면서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고 할말은 하는 고집으로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852년 50세로 죽었다.
시인으로서 주된 관심은 시의 표현 문제였다. 칠언절구에 집착해 기교적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애정을 노래한 시가 많지만 이상은과는 달리 감정 표현을 절제했다. 그는 번진의 위협과 북방 이민족의 변경 침략을 걱정하는 애국시인의 면모도 보여준다. 부국강병을 통해 잃은 강토를 되찾고 왕조를 번성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회수와 장강은 당 왕조의 생명선”이라며 국방과 치안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안보와 용병에 관심이 많아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사회는 무너져 내리고 앞날은 불투명한 만당 시대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심약한 시인의 한계를 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