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과거사 정리로 본 5·18의 과제]<4> 여순사건
부역자 색출 핑계로 학살… 전남서 민간인 1만여명 희생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촉발
여수 국방경비대 14연대 2000여명 “같은 민족에 총 못 쏘겠다” 반발
병력 탈출한 상황에서 협력자 색출 우익인사가 손가락 지목하면 총살
여수·순천·광양 등서 대거 희생…군사정권 거치며 70년간 침묵
2018년 09월 05일(수) 00:00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여수시 만성리에 자리한 형제의 묘. 1949년 1월3일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됐던 부역혐의자 125명이 끌려와 처형된 곳으로, 이름에는 희생자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1948년 10월19일 제주 4·3사건으로 촉발된 여순사건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오랜 기간 언급이 금기시 됐었다. 진실을 가리는 장막 한 꺼풀만 벗기면 원인과 결과, 과정을 쉽게 알 수도 있었지만 군인들의 반란이라는 이유로 유족들과 관련자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살아왔고 국가는 외면했다.

여순사건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특별하다. 그동안 대립했던 유족회와 경우회 등 보훈단체가 화합해 ‘여순사건 7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를 함께 꾸렸고 오는 10월 합동위령제도 지낼 예정이다. 국회에서도 여순사건 진상규명에 관심을 보이며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다.

◇“같은 민족에 총 못 쏘겠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지난 2009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2000여명의 반란을 시작으로 1950년 9월28일 수복 이전까지의 전남·전북·경남 일부지역 민간인 집단희생과 일부 군경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정의했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진정되지 않자 정부는 여수 주둔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투입하기로 했다. 같은해 10월 19일 오후 8시, 지창수 주임상사를 비롯한 제14연대 병사들은 같은 민족을 진압할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하나로 인식하고 철저한 진압 방침을 세웠다. 육군총사령부는 21일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같은 달 24일 여수를 공격한다. 비행기까지 동원하는 등 군 역사상 최초로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펼친 끝에 27일 여수·순천과 인근 지역 탈환이 대부분 마무리됐다.

진압군과 경찰, 우익단체가 점령한 여수·순천지역에서는 협력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이른바 ‘손가락 총’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됐다. 14연대 정규 병력은 이미 산악지대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여수의 경우 10월26일부터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 등 공터에서 ‘부역자 심사’가 진행됐다. 당시 심사 기준은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 흰 고무신(당시 인민위원회가 보급)을 신은 사람, 국방경비대에 지급된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사람 등 매우 자의적이었다.

경찰이나 우익인사가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법적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즉석에서 참수·총살됐다.

여순사건의 영향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는 등 이때 형성된 반공체제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형성하는 근간이 된다.

민간 연구기관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여순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여수 5000명, 순천 2000명, 광양 1300명, 구례 800명, 보성·고흥·곡성 700명 등 총 1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인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1948년 11월11일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 현장.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모습.
◇70년 간의 침묵 속 더딘 조사=군인들의 반란이었다는 이유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은 군사 정권을 거치며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70년 전의 아픔을 기억하는 여수시민들도 자칫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속으로만 삭였다.

1960년 4월19일 유족회가 만들어지고 유골 발굴, 책임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나 나왔지만 1961년 박정희 군부에 의해 탄압된다. 이후 1992년 ‘14연대 반란사건’ 명칭 개정운동이 일었고 1995년부터는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여수사건 피해자 실태조사가 시작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통합 특별법’ 제정운동이 진행된다. 지난 2005년 5월31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같은해 출범하자 여순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신청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1450건이 접수됐고 이중 832건에 대해 조사 개시가 결정됐다. 2년 간의 조사 결과 832건 중 진압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626건(2043명, 75.2%), 반란군·좌익 등에 의한 희생이 74건(189명, 8.9%)였다.

하지만 진화위는 활동기간이 정해져 있었고 신청사건 위주로 조사를 진행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일부 유족의 신청만 이뤄져 전반적인 피해상황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4월 정인화 민주평화당 국회의원의 대표 발의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입안됐지만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하고 있다.

올해 초 주승용 국회부의장은 유족회측에 “임기 내에 여순사건 진상규명 특별법을 꼭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며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유족회는 현재 20만명 이상을 목표로 청와대 청원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황순경(80) (사)여순사건여수유족회장은 “여수가 화합과 상생으로 가려면 그 전에 여순사건의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다”며 “직계 유족 대부분 고령이고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어 조사 시작이 시급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상생과 화합…진실규명·위령사업 첫발=70주년을 맞은 올해 여수시의회는 ‘한국전쟁 전후 지역민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며 기념사업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달 16일 민간인 유족과 경찰 유족이 함께 참여하는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가 꾸려진 데 이어 27일에는 여수, 순천 등 동부권 6개 시군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여순항쟁70주년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여수시는 조례에 따라 1억4600만원을 추진위에 지원한다.

추진위원회는 올해 10월께 위령제와 학술대회, 시민토론회, 여순사건 유적지 걷기, 지역 예술인 추모 공연 등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10월19일에는 이순신광장에서 민간인·경찰 유가족이 함께 합동 위령제를 열 방침이다. 지금까지 위령제는 따로따로 지냈다.

또한 신월동 옛 14연대 주둔지(현 한국화약 여수공장),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 등 관련 유적지에 설명문이 적힌 표지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황 회장은 “이제라고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니 다행스럽다”며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김창화 기자 chkim@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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