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의 경계와 지역 문학에 관한 소고
2018년 06월 14일(목) 00:00

[최류빈 시인·전남대 생물공학과 4년]

천편일률적으로 정의되고 교육되는 시가 싫었다. 전공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진로는 결정된 미래처럼 진부했다. 돌이켜 보면 세상은 통섭적이고 복합적인데,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 아이러니했다.

우연일까? 그러다가 시(詩)라는 놈을 만나게 되었다. 문학은 폐쇄적이지 않고 간절히 팔 뻗는 이에게 손을 얹어 주었기에 나는 문학에 오롯이 투신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문장들과 사유들이 가슴을 때리자 악- 소리를 질렀다. 이래로 나는 시인을 살게 되었으니 운명일까?

잠깐 지른 소리여서인지 메아리가 없다. 시(詩)를 사랑하는 지역 청년들은 웅크리고 있는 걸까? 아니다. 대학로를 지나가던 길, 낮게 걸린 취업 설명회 현수막이 가련하게 흔들린다. 청년들은 부는 바람을 생각할 여유가 마땅히 없고 그 자체로 바람의 생(生)을 사는 듯하다. 시절은 어느 때나 힘들었다지만 지금 젊음은 표류하고 있다. 와중, 어쩌면 문학의 소외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십대 문학 예술인을 알아보려고 검색을 해 보면 거의 전멸에 가깝다. 더불어 문학 권력이 중앙에 편중되어 있고 젊은 문학도와 예술인들은 다 멀리 가있는 현실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이른바 ‘청년예술인’이 ‘지역’에서 문장의 날개를 펼치기는 마냥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내가 덜 두리번거린 탓인지도,

문단에, 특히 지역에 새로운 문학의 활력이 공급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이 더 큰 가치를 표방해야 한다. 근래 수능에 출제되었던 문제를 시를 쓴 원 저자마저 풀 수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입시도 큰 가치를 갖지만, 교육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면모를 떠나 본질적 고민과 학문적 탐구를 기치로 내걸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은 이렇게 길러진 창의적인 인재들이 그 어떠한 차별이나 편견 없이 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필두로 떠오르는 어두운 민낯은 예술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킨다. 이러한 부정적 모습을 지우고 문화예술은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이젠 녹록치만은 않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되, 지역의 특장(特長)을 믿고 젊은 문학도 저마다가 지역 문단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광주에도 ‘오월 시인’ 김준태 선생부터 ‘여수’의 서효인 시인 등 기성의 경륜과 충분한 인적 자원들이 있다. 예향의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앙 문단’이라는 말을 파훼시킬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신인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전공이나 성별, 출신 따위의 외부적 실루엣만을 더는 따지지 않고, 진정 실력 있는 문학인들이 지역 문단의 심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믿고 따라왔던 상상의 경계 속에서 우리는 지역과 중앙, 등단과 비등단 등을 구분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이 한국문학을 진일보 할 수 있는 기회에서 비켜 나가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는 낮게 성찰하고 기성 문단의 지혜를 배우되 젊은 열정과의 접점까지 도출해 낸다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이른바 지역이 중앙이 되는 긍정적 도치에 도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연대할 때 더 거대해진다. 젊은 문학도들이 웅숭그리던 손잡고 일어나, 두 손 가득 땀이 찰 만큼 문학으로 왁자지껄 했으면 좋겠다. 주변을 둘러보자 각급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문예창작과나 인프라는 신인 배출에 있어 굳건한 힘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길을 이미 거쳐 간 문학도들이 남긴 족적들은 나와 같은 신인들이 쫓아갈 빛이 되어주고 있다.

이제 빛으로 글을 쓰자! 여기 빛고을이 결코 예술을 하는 데에 있어 불리한 도시가 아니라고 힘 있게 생각해 본다. 내게 올 다한증이 기다려지는 여름 밤, 메아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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