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시인]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다
2017년 11월 17일(금) 00:00
늦가을 남도는 먹색이다. 초록이 지고, 단풍이 지고 나면, 나무나 풀들도 색을 지우고 선만 남긴다. 붓으로 툭툭 친 것 같은 풍경이다. 산이나 들판도 먹으로 친 도포 자락 같다. 눈이라도 내린다면 더할 것이다. 농담(濃淡)이 있다. 거기에 온 세계가 다 담긴다. 남도가 먹으로 덮였다. ‘수묵 프레비엔날레’로 남도의 숨구멍이랄 수 있는 목포와 진도 일대에 수묵화 물결이 덮친 것이다.

수묵화로 들어가는 입구는 호남선의 끝이자 시작인 목포역이다. ‘검은 땅위에 하얀 수묵화’란 제목으로 전남예술고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수묵화를 그렸다. 정확히 말하면 수묵화가 아니라 분필화였다. 화풍만 수묵화의 전통적인 방법을 따랐다. 하지만 픽사티브 등 고착제를 이용해 ‘2017 전남 국제 수묵 프레비엔날레’ 기간 동안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지워지고 없다. 기술적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전시장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목포에 13군데, 진도에 3군데이다. 도청으로 가니 구석진 곳에 두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김선두와 김억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을 비추는 조명은 따로 없고, 관람객도 드물다. 김선두의 그림은 길이가 30미터쯤 되어 보이는 대작이다. 산을 그렸는데, 김선두 특유의 선과 재치가 돋보인다. 김억은 ‘수원화성’ ‘대추리의 풍경’ 등으로 이름을 떨친 판화 화가이다. 부감법이 돋보인다. 새의 눈이라지만 독수리의 눈이다. 눈이 보리가 되어 풍경의 틈까지도 찌어낸 것 같다. 하지만 조명도 적절하지 않고, 칸막이도 없다.

중심 무대는 목포 문화예술회관이다. 전 세계 11개국에서 2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2017 전남 국제 수묵 프레비엔날레는 본전시가 열리는 목포 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전시 프로그램 10건, 교육 체험 공연 프로그램 14건 등 24개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본전시에는 이철주, 이종상, 송수련, 조환, 김대원, 허진, 허달재, 김선두 등 70명의 한국 작가와 고딘 브래드 비어, 중국의 자오치, 타이완의 홍건션(洪根深) 등 27명의 외국 작가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특별전시에는 한국의 김억, 김종경, 이인, 박문종, 임만혁, 이이남 등과 호주의 에드워드, 영국의 사이몬 훼텀 등 국내외 작가 135명이 참여했다.

허달재와 김종경의 그림은 서양화 기법에 먹선을 얹었다. 조각조각의 헝겊을 기운 것 같다. 기운 틈에 여백이 있다. 먹이 지나간 길이 언어라면, 먹이 지나가지 않은 면은 침묵이다. 많은 말 틈에서 침묵만이 말을 하고 있다. 이철주의 그림은 여백을 위해 화면의 대부분을 메운 그림이다. 화가는 굵은 선을 덧칠하고 덧칠했지만, 돋보이는 것은 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여백만으로 그린 것 같다.

먹선이 많은 그림은 합주곡 같다. 박종갑의 그림이 그렇다. 우거진 나무의 잎들이 저마다 소리를 낸다. 문득 한 곳이 조용하다. 소리가 뭉친 부분이 있고, 소리가 없는 부분이 있다. 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개성으로 완성된 음악들. 눈이 닿는 곳마다 다른 음악이 나온다.

남도의 그림이 회화사의 한 쪽을 차지한 것은 소치 허유로부터이다. 그가 점을 찍었고,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이 선을 그었다. 그리고 금봉 박행보와 계산 장찬홍 등에 이르러 남종화는 완성되었다. 연진회 사람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재가 1944년 문을 닫았다지만, 의재 허백련의 제자에서 제자로 맥이 이어져, 최근의 송대성까지 그 맥이 닿는다.

금봉은 남종화의 장자다. 생존 화가 중 소치와 의재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이들 중 앞자리에 놓여 있다. 남도의 화가들 중 의재 허백련을 공부하지 않는 이는 드물다. 관통하건 베끼건 비끼어 가건 의재를 건너야 그림이 있다. 의재 허백련의 묘소에 오랫동안 시묘살이를 했던 이가 있다. 의재의 마지막 제자라 말해지는 계산 장찬홍이다. 몸이 불편한 그는 목발을 짚고 한라산을 다섯 번 올랐던 강자다.

금봉은 그림을 본다. 먹이 남긴 농담은 평생 동안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늙은 누이의 마음처럼 무르고, 선 끝은 이른 봄 새순처럼 날카롭다. 운염법이라 했다. 농담이 있다. 북의 화가인 이건의의 그림이 마주 보고 있다. 선과 색이 다르다. 색이 없는 박행보의 그림에는 생동감이 있고, 색을 가미한 이건의의 그림에는 깊이가 있다. 색을 쓴 그림은 단순해지고, 색이 없는 그림은 농담과 선의 운용이 자유롭다. 이런 역설이 둘을 하나이게 한다. 남북도 하나이고, 시도 음악도 춤도 하나인, 이곳은 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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