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진압작전은 자위권 아닌 학살 … 헬기사격은 작전의 기본”
2017년 05월 15일(월) 00:00
5·18 도청앞 집단발포
공수부대 현장 지휘관의 최초 고백
그는 사람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언어를 썼다.

“광주에서 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누구처럼 “광주와 나는 관계없다. 할 말 없으니 가보시오. 40년 다된 얘기를 광주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떠들어대나. 그땐 광주가 폭도들 세상 아니었나. 헬기 사격이란 것도 말이나 되는 소린가?”라고 강변하는 대신 그는 찻잔에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곤 한참을 저었다.

윤성식(61·가명)씨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6일 국내의 한 섬지역 건물 안이었다. 윤 씨는 37년 전인 1980년 5월18일 12명의 부하를 거느린 현지 지휘관으로 광주에 투입된 진압군 초급장교(중위·지대장)였다. 소속은 특전사령부 제11공수여단 63대대. 직속상관은 대대장 조창구 중령, 여단장 최웅 준장, 사령관 정호용 소장. 그 뒤에는 전두환이 있었다.



“5월 21일 도청 앞서 나도 쐈다”



지난 1980년 5월 21일 중위 윤성식은 도청 앞에 서있었다. 1977년 겨울 육군3사관학교를 마치고 임관했으며, 1979년 11공수여단에 부대배치를 받은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팀원 12명을 포함한 63대대, 61대대(대대장 안부웅 중령), 62대대(대대장 이재원), 7공수여단(신우식 준장) 35대대(대대장 김일욱) 부대원과 함께였다.

시위대는 전날 밤 계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시민 2명이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지나 도청으로 향했다. 시민들 숫자는 몇 시간 사이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오후 1시께 집단발포가 시작됐다. 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가 금남로에 있던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얼마 안 돼 버스 한 대가 군을 향해 달려간 직후였다.

윤성식 중위는 즉각적으로 들고 있던 M 16 소총을 앞을 향해 발포했다. 탄창 한 통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해 쐈다. 서서 쏘지 않았다. 사격 당시에 그는 ‘무릎 쏴’,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달려오는 버스 운전기사와 차량 앞바퀴를 집중 사격했다. 윤 중위가 가장 먼저 쐈는지, 그의 총구에서 나온 탄환이 운전기사를 정확히 타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격 후 얼마 안가 버스는 한쪽으로 쳐 박혔다.

그는 “화염병은 날아오지, 시위대는 언제고 달려들 태세지. 줄지어 횡으로 서있던 버스 중 한 대가 달려 오자 일제히 사격을 했다”고 말했다. “사격이 있기 전 실탄은 대대본부 행정병들에게 이미 분배받아 장착돼 있었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윤성식씨에 따르면, 집단 발포 전 시위대가 도청 방면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자 장갑차에 장착된 캘리버 50이 불을 뿜었고 시민들이 혼비백산했다.

실탄은 장갑차에서의 사격 이후(또는 그 이전) 2∼3명의 대대 행정병에 의해 대대 간부(장교, 부사관 등 100명가량)에게 분배됐다. 윤성식씨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대대 행정병들이 돌아다니며 실탄 분배를 했겠느냐. 그건 당연한 거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급받은 탄환의 수량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선 “군은 상명하복이다. 불상사가 날 것 같아 속으로 철수 명령이 떨어지길 바랐지만 입 밖으로 감히 낼 수가 있나. 그때 도청에서 철수하란 지시만 내렸어도 집단발포는 없었고 시민들 희생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지휘부를 원망했다.

수첩에 ‘여기가 도청, 여기가 분수대, 여기가 전일빌딩’하고 위치도를 그려주자, “맞아 맞아 여기가 광주호텔인가. 조선대는 여기쯤. 버스 수십 대가 쭉 늘어섰었어”라며 볼펜을 넘겨받아 쓱쓱 그림을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마 그때 수십 명이 죽었을 거야. 달려오는 버스 운전기사와 바퀴를 겨냥해 계속 쐈다니깐. 그 뒤로도 한 참을 쐈지. 나만 쏜 게 아니야 다 쐈어”

21일 낮 첫 발포 이후 계엄군은 도청 주변에 저격수를 배치했다. 발포는 오후 4시까지 계속됐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2007년 발간).

그러나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을 공식 지휘하는 2군사령부는 도청 앞 집단발포 전날 ‘실탄통제, 발포금지’ 명령을 내렸다. 3공수여단의 광주역 발포 이후 20일 밤 10시30분 ‘작전지침 추가(작상전 444호)’를 통해 ‘발포금지, 실탄통제’를 지시했지만, 1시30분 뒤 자정 무렵 61·62대대, 21일 오전에는 63대대까지 실탄이 분배됐고 발포도 이뤄진 것이다.

이는 당시 계엄군 지휘체계가 2원화됐다는 증거이자 공수부대는 작전배속된 31사단이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2군사령부 지시가 아닌 사령관 정호용 등 다른 지휘관의 명령을 따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은 21일 오후 계엄군 자위권 발동을 천명하면서 이날 발포 행위를 합법으로 가장하려는 조치를 취했다(제5공화국전사 및 과거사위 보고서). 전두환 일당의 이런 조치는 ‘광주 투입 계엄군은 초병이 아니다’는 점에서 군인복무규율에 언급된 초병의 정당방위 내지 자위권 행사로 볼 여지가 없다.

그는 집단발포가 있고 철수하던 저녁에 봤던 금남로 모습도 기억해냈다. “그때 저녁에 철수할 때 보니까 버스 유리창이고 차체고 아주 벌집이 됐던 게 지금도 떠오른다니까. 얼마나 넋을 잃고 쐈는지, 너도 나도”

윤성식씨의 머리칼은 아직도 까맸다. 뱃살은 60대 남성들의 평균치에 키는 170㎝ 정도, 인상은 푸근했다. 대화 중간 중간 5·18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내비쳤다. “진짜 미안하지. 시민이었다니까, 폭도가 아니고. 뭐 북한군이 광주에서 활동했다? 그건 나는 모르겠어. 내가 보고 들은 바로는 그런 일은 없었어. 전두환이 그런 책을 냈다고? 그거 망상이지, 망상. 전두환한테 도구로 이용당한 나도 광주 얘기가 TV서 나오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학살 장본인이 광주사람들한테 할 소린가. 하느님 있긴 있는 건가, 있다면 뭐하는지 모르겠어. 놀고 계시나?” 윤성식씨의 말은 기자에게 진심으로 다가왔다.



“월남전 겪은 하사관들이 있었다”



“아이, 진짜 악랄했지. 경험이 있었으니까. 월남에 다녀온 사람들 아니오. 공수부대란 게 하사관(부사관)들이 주축인데,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아 공수부대 내에서도 전투력이 월등했지. 그런 하사관들이, 군에 말뚝박기로 작심한 하사관들이 통제가 됐겠소? 팀(지대) 단위로 움직이는 공수부대에서 스물서너살 초급장교 말을 고분고분 들었겠느냐고. 팀원 절반은 하사관인데 그 중 한 둘이 월남전에 다녀온 산전수전 다 겪은 중사, 상산데…. 앞장서서 때려 잡으면 졸병들이 가만있었겠느냐, 말입니다. 육사 나온 대대장 이런 지휘관들은 ‘대검으로 찔러라.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머리통을 때려라’ 이런 말 안 합니다. 그냥 ‘데모하는 놈들은 끝까지 잡아라. 초장에 기를 완전히 꺾어라 그랬던 거지’”

2시간 이어진 대화에서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 당시 월남전쟁(베트남전쟁)에 다녀온 부사관 중 일부가 통제가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5차례나 되풀이했다. “37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왜 그토록 무자비했나. 대검으로 쑤시고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죽일 만한 이유라는 게 있었나. 정신교육이 엄청났나, 아님 정말 광주시민이 폭도로 보였나, 대체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당시 경찰이 울며 말렸을 정도로 공수부대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는 전언도 질문에 보탰다.

전두환은 부인하고 있지만 세상은 발포명령자를 ‘전두환’으로 보는데 주저함이 없다.

목격담만 무성했던 계엄군 헬기 사격은 37년 만에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총탄흔적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정지 비행 중이던 헬기에 의한 사격 흔적’으로 결론 내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남은 궁금증은 ‘공수부대는 왜 그렇게 무자비했나, 당시 행방불명자들은 어디로 갔나, 그들은 왜 아직도 광주학살을 인정하지 않나.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쥐여준 총칼을 왜 무고한 시민들에게 휘둘렀나. 왜 그토록 무자비하게’ 다.

특별한 기대 없이 툭 던진 질문에 “(살육을) 경험한 월남전 출신 하사관들이 일부 있었다. 몇 놈이 술을 마셨다고 상식적으로 그렇게 무자비했겠나”라는 예상 밖의 발언이 당시 광주에 투입된 초급 장교에게서 반복됐다.

그간 계엄군의 과잉진압은 광주 시위를 의도적으로 확산시켜 광주를 정권 찬탈을 위한 제물로 삼기 위한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의 계산된 작전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지난 1980년 6월 20일 당시 광주지검 공안과에서 작성한 ‘외부누설 엄금’이라는 도장이 찍힌 검시인원 165명에 대한 사망원인 분류표에는 ‘자상 5명’이라고 적혀 있다. 대검으로 죽임을 당한 시민 숫자가 최소 5명이라는 뜻. 대검에 의한 부상자는 제외된 숫자다.

윤성식씨는 “공수부대가 착검 후 찔렀다”는 대검 사용 방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기자님도 군대 다녀와 알겠지만 대검은 허리춤 탄띠에 차지 않소? 에이, 반항하니까. 진압봉 들고 뛰어가 두들겨 패다가 반항하거나 도망치니까 뽑아서 썼지, 썼겠지. 총을 등 뒤에 매고 거기에 꽂아 쓰고 싶을 때 총을 돌려매고 찔렀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겠지….”라고 했다.

계엄군이 대검을 착검한 후 시민을 찔렀고, 착검한 상태로 광주 금남로에 서있던 공수부대원 모습이 당시 광주일보 카메라에 포착돼 널리 퍼졌다는 얘기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곤 발언 일부를 주워담았다. “내 부하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애절한 확성기 소리 지금도 귀에 생생”



공수부대 과잉진압 얘기 도중 윤성식은 ‘조선대 뒷산에서 들었던 확성기 소리’를 불쑥 끄집어냈다.

“그 여자 누구였소, 살아는 있소? 한 60살은 됐겠지요. 애절했어. 진짜, 목소리가 애절했어요. 도청을 버리고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한 뒤였지. 밤새도록 계속됐던 것 같아.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시민들을 다 죽이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여주세요. 광주시민들이 똘똘 뭉쳐 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뭐 이랬던 것 같아. 아이고, 나도 사람인데 마음이 아팠지. 하여튼 뭐 진짜 애절했어. 그 확성기가 뭔지 몰라도 진짜 생생했어. 지금도 애절하다니까”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에 따르면,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있었던 날 밤, 총소리와 함께 시민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금남로가 피바다를 이뤘던 1980년 5월 21일 밤 차량에 올라 가두 방송을 했던 전옥주·차명숙씨 목소리로 추정된다.

확성기 소리가 멈췄던 22일 오전 9시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은 비서실장 허문도를 통해 중정 전남지부에 전화를 걸었다. 정석환 지부장 직무대리에게 전두환은 “나 부장인데, 특전사 11여단장 최웅 장군의 소재가 지난밤 이후 파악되지 않고 있으니 전 조직원을 동원해서 소재를 파악하고 부장실로 보고하라”고 지시한 후 “최 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분발하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 명의로 격려금 100만 원을 전달하라는 지시도 덧붙였다. 1시간여 흐른 뒤 정석환은 소식을 듣고 사무실로 찾아온 11여단장 최웅에게 전두환의 발언을 전하고 100만 원을 건넨 뒤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최웅을 연결했다.

정석환은 지난 1995년 12월 27일 서울지방검찰청 채동욱 검사실에 출석, “최웅 장군이 전두환 부장과 통화한 후 자신감을 얻는 모습이었다”고 진술했다. 검사가 “왜 최장군의 사기가 저하됐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정석환은 “21일 시위대 진압작전 중 살상자가 많이 발생한 데 따른 충격으로 사기가 저하돼 자취를 감췄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에서 “최규하 대통령 보좌관 최○○장군에게서 ‘광주에서 총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 있다’는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온 점에 미뤄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데 반해 전두환 부장은 알고 있었다. 군부 계통을 통해 시시각각 상황을 보고받는 것 같았다”는 진술도 했다.

여단장 최웅의 잠적 소동에 대해 윤성식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날 오후 도청 앞에서 시민 수십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부상했는데 고작해야 별 한 개, 준장이 정신이 있었겠느냐. ‘계엄군 물러가라’고 외치며 고작해야 화염병 몇 개를 던진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국군이 총을 쐈는데…. 지휘책임 문제도 있고.”



“부대원들 넋을 잃고 총질했다”



윤성식씨는 80년 5월 광주에서 잊지못할 기억 가운데 하나로 송암동에서 있었던 계엄군 간 오인사격을 들었다. 부대원 9명이 숨지고 그의 대대장 조창구는 오른팔을 잃은 사건이었다. 역시 공수부대와 현지부대(보병학교 교도대대 등)간 지휘권이 2원화되고 무선망이 개별 운용된 탓이었다. 공식 지휘계통이 아닌 별도의 지휘라인에 의해 공수부대가 작전을 벌였다는 증거였다.

사고는 5월 24일 오후 1시55분(조창구 검찰 진술서) 효천역 부근에서 63대대 병력이 장갑차를 선두로 차량 이동 중 일어났다. 매복 중이던 보병학교 교도대대 병력이 공수부대를 시위대로 오인, 집중 사격하면서 삽시간에 9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윤성식씨는 “그때 오인사격이란 사실이 확인돼 사격중지! 사격중지! 라고 수차례 외쳤는데, 부대원들이 넋을 잃고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들고 있던 소총 개머리판으로 일일이 대가리를 쳐대니까 서서히 총성이 멈췄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보병학교 교도대대 애들이 얼마나 명사수야. 매복해서 우리 쪽으로 무반동총을 쏘니까 장갑차고 뭐고 난리가 났다. 차 대위(63대대 작전장교) 시신을 봤더니 몸통이 아예 두 동강이 난 상태였다”고 말했다.



“정권찬탈에 눈 먼 전두환의 도구였다”



“백번 양보해서 도청 앞 발포는 자위권 행사로 쳐요, 근데 마지막날 새벽 도청 진압작전은 어떤 이유로 합리화가 됩니까.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이게 아니면 뭐냐고. 적군도 아니고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새벽 기습 특공작전을 펴고도 합법이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근데 아직까지 사과도 않고 뻔뻔하게 ‘나는 광주와 관계없다’는 책을 냈다고?”

전두환 회고록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대목에서 그는 분개했다. 마치 5·18 유족이라도 되는 양, 아니 그들보다 더 화난 목소리였다. 혀도 연방 찼다. 자신을 비롯한 광주 투입 계엄군을 가리켜 ‘정권 찬탈에 눈 먼 전두환의 도구’로 쓰였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면서도 “에이, 광주에서 죽은 사람이 얼만데, 내가 감히 피해자라고 하면 안 되지…”라는 말도 했다.

항쟁 10일째. 5월 27일 새벽 도청과 전일빌딩, YWCA에서 최후 항쟁을 벌이던 광주시민군 진압을 위해 계엄군은 특공조를 편성, 기습 진압작전을 펼쳤다. 특공조 투입 후엔 금남로 곳곳에 20사단 병력을 투입시켰다.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민주화를 열망했던 5월 광주는 그렇게 유혈 진압됐다.

이른바 상무충정작전 수립 관련, 당시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지난 1996년 채동욱 검사실에서 “5월 23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육군총장실에서 육군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던 이희성, 참모차장 황영시, 수경사령관 노태우, 2군사령관 진종채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시위진압 방법을 논의했다는데, 그때 ‘희생이 따르더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야한다’는 취지의 전두환 지침(소준열에게 정호용이 전한 전두환의 친필 편지)이 논의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라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고 진술했다.

이로부터 37년이 지난 올해 1월, 11공수여단이 투입됐던 전일빌딩 10층 내부에선 헬기총탄 흔적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전일빌딩 10층이 그동안 비어있었기에 흔적은 온전했다.

“윤성식 당신도 그 작전에 투입된 것 아닌가, 헬기사격을 목격하지 않았나?”

“나는 직접 하고 본 것만 말한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우리 지역대는 투입되지 않았다. 다만, 기습작전이란 본래 헬기로 선제 공격을 해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은 뒤에 하는 것이다. 헬기사격은 당연한 일 아닌가. 기습작전을 하려면 헬기를 건물 옥상에 착륙시켜 군인들을 투입시켜야하는데, 건물 안에 있던 시민군들이 응사하면 어떻게 되겠나. 헬기 한 대라도 추락하면 그건 작전 실패다. 이건 생각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야. 당연한 거지”

그는 캘리버 50(기관총)에 대해서도 말했다. “캘리버 50 소리를 들어봤나. 갈기면 어떤 생각이 들겠나. 적군이고 아군이고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질질 쌀 정도다. 순간 동작 그만, 숨거나 움직일 생각조차 못한다. 그날 새벽에 캘리버 50을 쐈는지, 헬기 기총소사를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순식간에 진압이 끝났다는 얘기는 뒤에 들었다”

이 작전과 관련해 대법원은 지난 1997년 판결에서 “(1980년 5월 27일) 광주재진입작전명령에는 ‘작전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해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작전명령에는 살상행위를 지시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판시했다. 전두환은 대법원 유죄 확정(내란목적살해 등) 판결을 통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2년여 뒤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리고 올 봄 자신의 아내와 함께 회고록과 자서전을 냈다. 책의 요지는 “광주학살자 누명은 정말 억울하다. 광주와 우리는 무관하다. 우리도 5·18의 피해자다”였다.



“그때 일기를 썼다 광주에 드리고 싶었다”



우리의 대화는 2시간 만에 끝났다. 교통편 시간 때문이었다. 건물 밖으로 ‘광주사람’을 배웅나온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방 담배를 빨던 그가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 입을 뗐다.

“광주에서 왔단 소리에 숨어버릴까. 도망칠까. 사람 잘못 봤다고 할까. 막무가내로 쫓아낼까. 그 찰나에 수만 가지 생각이 났소. 무척 놀랐고 당황했소. 무척 오래돼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일이지만 난 사실을 말해야한다고 결정했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너무 늦었지만 광주사람들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내 얘기는 실명만 밝히지 말고 써주시오. 사진도 얼굴만 나오지 않게 얼마든 써주시오. 그래야 믿을 거 아니오”

부탁도 했다. “피해자들에게만은 내 연락처를 주시 마시오. 미안하지만 부탁입니다”

광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윤성식씨와 통화를 했다. 그는 광주에 투입됐던 기간 시간만 나면 일기를 썼다고 했다. 왠지 이런 날이 올 것도 같았다고 했다. 그 걸 보면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데, 그 걸 주려고 온 집안을 뒤졌는데 못 찾았으며, 이사 다니는 동안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주에도 (5·18 공수부대원들이) 많이 있을 텐데, 왜 멀리 이 섬까지 왔느냐. 주둔지역이 전북이었던 7공수여단 출신들이 광주에 적지 않게 살고 있지 않으냐. 아무도 고백하지 않느냐? ”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발포명령을 포함해 5·18 진실에 대해 대대 작전장교 등 위관급 장교, 소령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며 지금도 상당수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는 세상에 진실을 말할 때가 됐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고도 했다. 전두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대장급 이상 장교들은 80년 5월에 대해 쉽게 말문을 열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했다.

윤성식씨는 1985년 대위로 전역했다. 아내와 딸 하나를 뒀다. 5월 광주에서 자신이 한 일은 물론 투입됐다는 사실 자체도 여태 입 밖에 낸 적이 없다고 했다.



/김형호기자 kh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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