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안덕례씨] 나를 지탱한 팔할은 뚝심이었다
2016년 07월 14일(목) 00:00
“나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 ‘국제시장’이 주는 혜안은 이 대사에 점철되어 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의 이야기다. 그들은 가난이라는 고통을 발효시켜 오늘의 새벽을 만들었다. 영화 속 덕수와 영자처럼 딱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있다. ‘국제시장’이 아버지로 관통하는 이야기라면, 파독 간호사 덕례는 우리 시대 어머니가 겪은 리얼리티의 전형이다.



파독 간호사 안덕례(66세)는 자기 색이 뚜렷하다. 생각이 있다면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도 떨어지고, 취업도 안됐단다. 그때의 상황을 쿨하게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가난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 간호보조원을 양성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엔 이모 집에 몸을 얹혔다. 하지만 이모집의 녹록치 않은 살림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교육 첫 시간에 급한 나머지 ‘누가 나랑 자취할 사람 없어요?’라고 다짜고짜 물었지. 그랬더니 얌전하게 생긴 충청도 아가씨가 슬그머니 손을 들더라고.”

결국 전라도 여자와 충청도 여자가 만나 방을 얻은 곳은 당시 동대문 뒤의 산동네였다. 방이 싼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코딱지 만한 방 한 칸은 그나마도 흙바닥에 신문지를 발라 놓은 상태였다. 그 위에 이불 하나 얹어 생활했다. 주인 아저씨는 중풍환자였고, 아주머니는 방직공장을 다니며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정도였다. 1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연탄가스 마시는 것도 다반사였다. 덕례에게 서울의 삶은 전쟁터처럼 치열했다.

1년 교육이 끝나자 그녀 표현대로라면, 구질구질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고, 독일행을 선택했다. 4녀 2남의 장녀인 덕례의 의지를 꺾을 가족은 없었다. 덕례가 독일로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가 ‘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아야 되요? 우리도 좀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했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청과물 장사를 했다. 계절에 따라 과일밭을 사서 수확해 내다 팔았다. 과일철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덕례를 집에 혼자 두고 여러 날을 시골에 있는 밭으로 가셨다. 동생과 8살 터울이 난 터라 어린 날의 기억은 늘 혼자였다. 방 벽에 수없이 밑줄을 그으며 지루하게 하루를 보내고 빛과 어두움으로 낮과 밤을 가늠했다. 어머니는 옥수수 가루 한 대를 덕례에게 맡기고는 그것으로 끼니를 이어가라고 했다.

어린 덕례는 나무에 불을 피워 양은냄비에 죽을 쑤었다. 옥수수 가루죽이 아까워 한 끼에 한 숟가락씩만 떠먹었다. 배고파 허덕이며 잠자리에 들곤 했던 그때. 지금도 덕례는 옥수수, 말만 나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기에 가난의 옷을 벗고 싶었다.

덕례는 1971년 독일 하노버 인근 마을 병원 응급실에서 병동생활을 시작했다. 병원 근무하면서 간호학교도 졸업했고, 병원 쉬는 날에는 양로원에 가서 일을 하거나 남의 집 아이를 돌봐주는 일도 병행했다. 생활비 50마르크(한화 4만원)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때는 고국에 송금하는 것이 한국 간호사들의 최고의 미학이었다.

동양에서 온 작은 천사 덕례는 당당했고 친절했다. 그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응급실을 거쳐갔다. 독일인들은 ‘친절한 덕례 씨’를 위해 크리스마스 때 과자를 구워오거나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남편을 만났다. 당시 독일에 초청의사로 온 한국인 의사가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남편은 파독광부로 3년 근무한 후 전기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덕례는 큰 아이 영수를 낳고 3년이 되던 해에 베를린 노이쾰른에 있는 양로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도시의 병원 생활은 시골보다 냉정했고 힘들었다. 남편은 동서독 장벽이 서 있는 베를린으로 온 후, 더욱 분단된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였고, 가난 때문에 파독광부를 지원한, 한국 현대사의 중요지점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고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남편은 늘 고향을 향한 달빛에 멍하니 시선을 싣곤 했다. 사실 덕례는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이제 겨우 독일이 살 만 해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편의 고향 바라기는 커져갔다. 결국 덕례는 남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84년 한국에 영구 귀국을 했다. 미련 없이 떠나려고 독일 영주권도 포기했다. 서울 성내동 시댁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여동생들과 여의도에서 양식 레스토랑을 차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한국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업이 번창할 줄 알았는데 곤두박질쳤다. 게다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언어도 느리고 한국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그때 고생한 거 이야기하면 책 한 권은 나올 거야.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열 명도 넘은 시댁식구들 밥 해가며 큰 며느리 노릇하고. 이러다 죽겠다 싶더라고.”

결국 6개월 만에 시댁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옥탑방 전세를 얻었다. 하지만 점점 사업은 어려워졌고, 가정생활은 지쳐갔다. 결국 덕례는 또 한 번 인생의 기로에 섰다. 2년 6개월이 되던 해 다시 독일로 돌아온 것.

독일로 돌아온 덕례는 체류 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다시 찾아간 곳은 이전에 근무했던 양로원이었다. 덕례의 성실성을 기억하던 원장은 복직을 권유했다. 외국인청에 추천서를 써주었고 무난하게 독일에서 정착이 가능해졌다. 이때 남편은 적당한 직장을 찾기가 어려웠기에 ‘만나식품’이라는 한국식품을 차리게 되었다.

“그때 애들도 어렸고, 1인 3역을 했었어. 양로원 근무에 식품점 일까지 고생이 말도 못했지.”

설상가상으로 2004년에 남편이 중풍에 걸렸다. 덕례는 1년 동안 근무하던 병원을 휴직한 후 남편의 병을 보살피고 가게도 꾸려갔다. 힘들 때마다 곧게 일어선 덕례의 오뚝이 뚝심이 발휘되었다.

2009년 간호사 일을 끝내고, 23년 동안 꾸려왔던 식품점도 내려놓았다. 그해 나이 육 십이 된 덕례는 억척스럽게 해온 일들을 청산하고 회갑 기념으로 고국을 다녀왔다. 남편의 중풍이 완전히 낫진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고국 땅을 밟고 싶었다.

덕례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는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지혜로운 결정과 빠른 결단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시인 유하의 말처럼 그녀의 인생 속에 ‘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인생의 한 가운데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를 강하게 담금질했다. 인간 정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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