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다 도둑놈들이여
2016년 06월 17일(금) 00:00
본래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정해져 있다는 게 인성론(人性論)이다. 대표적인 게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착하다고 봤다. 하지만 이 착한 본성에 악(惡)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외물(外物)에 유혹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비해 순자는 인간의 도덕성이 선천적이란 것을 부정한다. 사람의 성(性)은 악(惡)한 것이고, 선(善)은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인성론을 배우면서, 성선설과 성악설의 중간쯤 되는 주장은 없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착한 것도 아니고 악랄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그런 생각을 유사 이래 처음 한 사람이 바로 나 아닐까, 잠시 우쭐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누구냐 하면 바로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인 고자(告子)다. 그는 인간의 품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했다. 다만 교육하고 수양하기 나름이어서 수행 과정에서 그 어느 품성으로도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서양에도 있으니, 영국의 존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다’ 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존 듀이 역시 ‘인성의 본질에는 선악이 없고, 환경의 영향으로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다만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선악이 혼재한다는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칸트는 ‘인성 중에 선에 대한 자질과 악에 대한 자질이 동시에 공존한다’고 보았다.

오늘 이처럼 장황하게 인성론을 늘어놓는 것은 요즘 여기저기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하도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 상계동 수락산에서는 등산하던 60대 여성이 살해됐고, 강남의 화장실에서는 젊은 여성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됐다. 강도 살인으로 잠정 결론이 났던 ‘의정부 사패산 살인 사건’의 범행 동기도 돈이 아닌 성폭행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전남의 한 섬마을에서는 주민 3명이 20대 여교사를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으니, 범인 중에는 여교사가 근무하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가 포함돼 있어 더욱 충격을 주었다. 외딴섬에 홀로 부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교사를 상대로 마치 태백산맥의 염상구처럼 더러운 성욕을 채웠다니,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쁜 놈들.

“젊은 선생님, 아따, 한잔만 마셔 봐봐. 인삼주는 술도 아니랑께요.” 선량한 학부모인 줄로만 알았던 마을 어르신(?)이 자꾸만 합석을 권하는데 차마 매정하게 거절을 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데도 여자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지 않겠느냐며 이러쿵저러쿵 떠벌리는 ‘마초’(macho) 집단들. 사건이 일어나자 여교사의 신상을 털어 인터넷에 퍼 나르는 사람들. 만약 당신들의 딸이나 누이가 그렇게 당했어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쁜 놈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전에 아는 섬이라면 해당화 피고 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어쩌다 총각 선생님이 부임하면 마을 아가씨들은 ‘소나기’의 소년처럼 첫사랑에 설레고, 어찌어찌해 운 좋은(?) 색시는 선생님과 인연을 맺기까지 했던 낭만의 섬이다. 하지만 총각 선생은 순정을 바친 아가씨를 남겨 놓은 채 서울로 떠나고, 그런 사연이 노래로까지 만들어진 게 바로 60년대에 크게 히트했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아니던가.

안온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사는 순박한 섬사람들이라는 이전까지 우리의 인식을 이번 사건은 단번에 바꿔 놓고 말았다.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 여교사의 삶과 인권을 송두리째 짓밞은 범인들의 짐승 같은 ‘행오’(행위)를 보면서, 이제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혹은 성선악혼설 쪽에 마음이 더 기울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범행을 저지른 그들 역시 평소에는 멀쩡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텐데, ‘뭣이 중한지도 모른’ 채 한순간의 욕심을 못 이겨 인생을 그르치고 말았다. “머시(무엇이) 중헌디? 머시 중허냐고? 머시 중헌지도 모름서….” 영화 ‘곡성’(哭聲)에 나오는, 역시 성폭행을 당했음이 분명한 효진의 소름 돋는 연기가 왜 이 대목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하긴 ‘뭣이 중요한지도 모른’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으니, 사건에 대처하는 전남도교육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고를 받고도 10여 일이나 지나서 교육부에 보고한 데다, 늑장 보고의 이유가 “사망 사고도 아니고 일과 후 발생한 일이어서 ‘보고 사안’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참으로 한심한 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젊은 여교사의 강단 있는 대응이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린 후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하고 DNA 확보 등 일련의 조치를 함으로써 자칫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으니.

하지만 평생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그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무쪼록 염상구에게 몸을 망치고 자결을 시도했던 외서댁이 나중에 여전사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의 가여운 여교사도 하루빨리 예전의 발랄했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 수밖에.

그나저나 여자로 태어나 안심하고 어디 한 군데 갈 데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생리현상을 느껴도 그저 참아야 하고, 건강을 위한 등산은 애초 생각지도 말고, 힐링의 섬 여행 같은 건 아예 꿈꾸지 말아야 한다. 예전 같으면 그림자도 밟지 못했을 여선생님이 외딴 섬에서 무참하게 당하고, 화장실 간 젊은 여성이나 등산하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순식간에 횡액(橫厄)을 당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여성들은 젊든 늙든, 가슴 속에 늘 이런 말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은 다 도둑놈들이여.” 예전에 딸 가진 부모들이 늘 강조했던 말인데, 정부도 지자체도 교육청도 믿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기에, 고작 그런 말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 또한 한없이 슬프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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