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계림동 장현자] 동독 형무소 … 잃어버린 5년
시어머니 뵈러 동독 갔다 입국하자 마자 체포당해
남편은 알고 보니 스파이 증오심에 자살 생각까지
엄마 별세 소식 ‘설상가상’ 피 토하며 절망감 빠져
2016년 06월 16일(목) 00:00

파독간호사로 일하던 시절의 장현자씨.

베를린 장벽 너머에는 그녀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89년 11월, 동서독 철의 장벽은 무너졌지만 그녀 가슴 속 희미한 벽은 여전히 생채기로 남아 있다. 돌연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미간을 때렸다. 그 바람의 끝에 오랜 기억의 호출이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치열했던 회오리 속에서 그녀, 장현자는 동서독 분단의 생생한 증언자였다.

꽃잎이 세상을 물들이듯 화사한, 그녀의 나이 열 아홉.

세상에 입김을 불어넣으면 열정이 솟구쳐 오르게 할 만큼 꿈이 있던 소녀였다. 아버지는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골프장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일본식 집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현자가 전남여중을 다니던 무렵, 부모님이 곗돈 문제로 집을 잃었다. 하루 아침에 온 식구가 산수동에 있는 할머니집으로 이사를 했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오래된 관습의 틀은 현자의 미래를 좌지우지했다. 현자는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빨리 졸업해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순천간호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 고려대 병원에서 일하면서 미국으로 가려고 서류를 준비하던 중 친구들이 독일 간다는 소식에 현자도 독일행 짐을 꾸렸다. 딸이 먼 타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목숨을 끊겠다고 할 정도로 말렸다. 하지만 현자의 의지는 완강했다.

그렇게 장현자(65세), 그녀의 인생은 통찰력을 가질 새도 없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독일에 오자마자 베를린 노이쾰른에 있는 병원 마취과에서 일했다. 1년 동안 어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병원 측에서 배려했고, 외국인이었지만 분에 넘친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청에 서류를 발급받으러 갔다가 그곳 공무원을 알게 되었다. 지적이고 친절한 독일남자는 현자에게 시선이 꽂혔고, 현자 또한 그의 따스함이 싫지 않았다.

사실 현자는 독일에 와서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충만한 사랑은 겉잡을 수 없었다. 함께 미래를 꿈꾸자고 속삭였다. 73년 4월, 그들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남편은 동독 사람이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63년 9월 자유가 그리워 땅굴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동독에서 살고 있었다.

현자와 남편은 인사도 드릴 겸, 74년 12월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현자의 어머니는 마흔 다섯 살로, 젊은 나이인데도 몸이 좋지 않았다. 기침을 심하게 했지만, 현자는 그때만 해도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다.

독일에 다시 돌아온 3개월 후, 남편은 동독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현자는 한국 국적 소유자였고, 동서독 관계는 서늘했으며, 세계는 냉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서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관할이었고 동베를린은 소련이 간섭했다. 현자는 남북 분단의 우리나라 정치상황에서 볼 때 공산권 지역으로 방문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괜찮을 거라며 함께 가자고 채근했다.

결국 현자와 남편은 동독에 입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난 그때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독일 정치도 몰랐어요. 언젠가 어떤 프랑스 장교라는 사람이 전화가 와서 남편이 어디서 일하는지 물었었는데, 그때 정보가 빠져나간 것 같아요.”

남편은 프랑스와 서독 정부를 위해 일하는 정치 스파이였다. 동독을 탈출한 남편을 서독 정부에서 국가 정보요원으로 활용했던 것. 남편 또한 공산주의를 증오했기에 스스럼 없이 서독 정부를 위해 일해 왔다. 결국 이때 동독지역을 방문하자 남편의 정보를 입수한 동독의 정보국에서 남편과 현자의 신병을 확보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군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현자는 남편이 스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철저히 가족에게도 비밀을 지키는 불문율 때문에 남편은 아내 현자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속였다. 현자는 처음엔 억울함에 남편을 죽이고 싶었고, 분노로 자살까지 생각했다.

현자는 한국 국적이었지만, 당시 한국 정부에서도 동독과 교류가 없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서독 정부에서는 현자에게 독일 국적을 만들어 보냈지만 동독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76년 9월 형무소로 전보가 왔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한국에 가서 뵈었을 때 기침을 많이 했는데 폐암이었나 봐요. 난 그때 어머니 부음을 듣고 충격을 받아 피를 토하고 몸무게도 40kg 겨우 나갈 정도로 쇠약해졌어요. 그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현자는 동독 형무소에서 음식과 언어도 통하지 않은 정신적인 감옥도 경험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토마스 만, 톨스토이 등 책을 읽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24살에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29살에 나왔으니 20대 청춘의 반이 날아갔네요.”

현자는 잊고 싶었던,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을 떠올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동독 스파이였던 귄터 기욤과 교환이 되어 풀려나올 수 있었다. 기욤은 당시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총애하는 비서였다. 그가 동독 국가보안부 소속 중앙정보국 스파이임이 밝혀지자 빌리 브란트는 74년에 총리직에서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79년 기욤 한 사람과 동독 형무소에 수감된 24명의 정치범과 맞교환되었다. 그중 한 명이 현자였다.

서독으로 돌아오자 현자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병원으로 복귀했지만 6개월의 휴가를 받았다. 또한 그동안의 손해 배상도 받았다. 현자는 3개월은 세계 일주를 하고 한국에도 방문했다. 자유를 찾은 기쁨과 함께 5년의 긴 공백이 부른 공허감과 상실감도 많았다.

“그때 한국 공항에 도착해서 어떤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였어요. 한국말을 알아는 듣겠는데 말은 한 마디도 못하겠더군요. 감옥에서 독일말만 써서 그럴지도 모르고 트라우마로 심리적 요인도 있었을 것 같아요.”

결국 현자는 통역사를 두어 인터뷰를 해야 했다.

현자는 외롭고 차가웠던 동독 형무소의 겨울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현자는 남편을 용서하고 마음을 다스리는데 4년이 걸렸다. 81년에 딸을 낳고는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지금은 손자 손녀 보면서 ‘행복’이라는 두 글자도 얻었다.

시간은 세찬 물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고국은 ‘분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분단이 빚어낸 암울한 에피소드를 조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겪어낸 그녀, 현자에게 고국의 통일은 필연으로 다가올 것 같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m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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