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정유선씨] 냄새난다며 할퀴던 독일 할머니 바꾼 건 사랑
2016년 05월 05일(목) 00:00
밤새 어머니는 고추장을 볶았고, 고추 부각을 튀겼다. 오랜만에 저녁 밥상에 유선이 좋아하는 계란말이가 올랐다. 동생들은 풍성해진 반찬에 잔치 날 같아 웃었고, 어머니는 이별의 아픔에 울었다. 그날 유선의 여행가방에는 양철통을 땜질해서 넣은 김치와 멸치튀김, 고추부각 등 먹거리가 풍성했다. 20kg 수하물에 15kg 이상이 음식이었다. 유선은 보물처럼 꽁꽁 싸 짐을 챙기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유선(70세)의 파독 간호사로서의 첫 발이었다.

독일로 오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인 간호사는 계속 울고 있었다. 사연이 구구절절했다.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떼어놓고 비행기에 오른 여인이었다. 남편이 쓴 편지 위로 여인의 눈물이 떨어졌고, 여인은 복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끄윽’ 소리만 내었다. 너무 가난해 가족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여인. 유선은 잘 접은 손수건을 건네며 ‘3년만 참자’고 달랬다.

유선의 집도 부유하지 않았다. 장흥에서 인쇄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 게다가 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사촌 동생들 셋까지 아버지가 양육해야 했다. 유선은 7남매 중 둘째였다. 동생들은 너무 어렸고 유선은 속이 깊었다. 빨리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유선의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체국에 다녔고, 유선은 간호보조원 공부를 했다. 사촌 형부가 개업한 병원에 간호사로 잠깐 일한 유선은 돈을 더 잘 번다는 욕심에 파독 간호사로 지원했다. 하지만 그 당시 동백림 사건의 여파로 독일행이 지연이 되었고, 70년 스물 넷의 나이에 고국을 떠났다.

유선의 어릴 적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창공을 가르며 마음껏 세계를 오가는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근데 난 키도 작고 얼굴도 잘 생기지도 않아서 지레 그 꿈을 접었어. 하하.”

유선은 그렇게 호탕하게 웃었지만 아쉬운 표정이 얼핏 스쳤다. 그래서 유선은 두 번째 꿈이었던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얀 간호사 복을 입고 환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실천하고 싶었단다.

독일에 도착해 뒤셀도르프 병원 중환자실에 배정되었다. 처음에 구토가 날 정도로 일이 힘들고 낯설었다. 음식, 문화, 업무 등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독일 올 때 정성스럽게 싸주신 짐을 공항에서 잃어버렸다. 다른 한인 간호사의 짐과 바뀐 것이다. 환영파티할 때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어야 할 때도 한복이 짐 속에 있는 바람에 유선만 개인사진을 따로 찍어야 했다. 막 와서는 음식이 맞지 않아 끙끙 앓았다. 일주일 동안 대변을 보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관장을 하라고 했지만 너무 창피해서 몰래 혼자 했다. 결국 짐은 한 달이 지난 후에나 찾을 수 있었다. 푹 익어 상해버린 김치를 보면서 유선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뒤엉켜 한바탕 울음을 토해냈다.

유선이 독일에 와서 가장 먼저 산 물건은 밥솥이었다. 그 당시 50마르크로 상당히 비쌌다. 독일음식은 너무 느끼해서 고추장을 함께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심지어 빵에 고추장을 발라먹을 정도였다. 한 번은 슈퍼에 가서 ‘그륀 콜’이라는 채소를 샀다. 그것을 김치로 담가 먹었는데 갓김치 맛이었다. 양배추 김치를 해 먹었고, 점점 김치재료도 진화했다. 시간이 흐르자 파독광부들이 쉬는 날을 택해 트럭에 한국 재료들을 팔러 다니곤 했다.

“(광부들이) 남자들이라 음식을 못 만들 줄 알았어. 근데 기가 막히게 잘 담그더라고. 자신들이 김치 맛있게 담근다고 간호사들을 꼬시기도 했다니까.”

그 당시 파독 광부들은 3년 계약이 끝나고 비자 만료가 되어 한국에 들어가야 했다. 독일에 남고 싶은 이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는 길이었다. 광부들은 한인 간호사들의 기숙사에 한국인 이름만 있으면 무작정 벨을 눌러 들어가기도 했다. 유선의 기숙사에도 8명의 한인 간호사들이 있었다. 그렇게 결혼한 부부들도 상당하다. 물론 당시 간호사들 중 절반 이상은 독일인과 결혼했다. 혼기가 찬 한인 간호사들은 부랴부랴 제 짝을 찾아 독일에 정착했다. 유선은 당시 독일에 온 유학생과 사랑에 빠져 함께 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그때 낳은 딸이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신 내 딸이 지금 독일항공의 스튜어디스로 일을 하고 있으니 내 꿈을 대신 이뤄준 셈이지.”

딸 이야기에 유선의 표정이 환해졌다. 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과 헤어져 혼자서 30년이 넘게 키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병동생활은 고달팠다. 뒤늦게 유선의 권유로 파독 간호사로 온 여동생은 3년만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함께 독일에 남았으면 오죽 좋아. 동생은 외롭고 힘들다고 한국에 가겠다고 했지. 결국 한국인 남편 만나더니 고향으로 돌아가드라고.”

유선은 동생을 보내면서 더 향수병이 진해졌고 마음이 힘들어졌다.

양로원에서 일을 할 때였다. 어떤 나이 든 독일 할머니를 위해 목욕을 시켜드리려고 하면 손톱을 할퀴며 냄새난다고 야단이었다. 유선은 할머니의 행동에 서러워서 눈물만 흘렸다. 이국땅에 산다는 것도 설움인데, 일에서 오는 부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데 언젠가부터 그 할머니가 참 불쌍하드라고. 내 모습 같았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그 외로움이 어쩌면 나보다 더하신 것 같았어.”

유선은 할머니의 등을 밀면서 “난 당신을 해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거야”라고 말하며 쓰다듬었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불러주며 할머니를 어루만졌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유선의 손길은 할머니의 마음을 녹였고, 이후부터 할머니는 유선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한 양’처럼 변했다.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니까 변하드라고. 돌아가실 때도 내 품에 안겨서 가셨지. 내 자장가를 들으면서 말이야.”

소녀 때부터 울음이 많았다는 유선. 지나온 시간의 퇴적층을 들추며 표정은 내내 울음빛으로, 목소리는 끊긴 테입처럼 중단되었다.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 중 올렌카가 떠올랐다.

사랑, 유선이 살아온 이유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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