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나주 박덕순씨] 노래로 운명을 이겨낸 그녀 … 유럽에 조국을 알리다
2016년 03월 17일(목) 00:00 가가
음대 진학 위해 파독 간호사 신청 독일행 3년만에 베를린음대 합격 합창단 콘체르트 코아서 남편 만나
소프라노 박모아 덕순으로 노르웨이 등서 매년 독창회
‘한국문화의 밤’ 올해로 10년 독일인 ‘도라지 합창단’ 창단 北 나진병원 돕기 음악회도
소프라노 박모아 덕순으로 노르웨이 등서 매년 독창회
‘한국문화의 밤’ 올해로 10년 독일인 ‘도라지 합창단’ 창단 北 나진병원 돕기 음악회도
시선의 이동은 고즈넉했다. 스무 살의 그녀는 무대의 동그란 조명 속 성악가의 얼굴로 파고들었다. 순천으로 지방공연을 온 음악가들의 무대를 보러 갔다가 운명적 순간을 만난다. 새로운 뷰포인트의 시작이다. 불안으로 가득한 삶 속에 열정이 스멀거렸다. 그녀의 심장은 며칠 동안 작은 새처럼 파닥파닥 뛰었다. “사실 간호학교를 다닐 때 음악시간에 ‘동심초’를 합창했는데 곡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다들 고음을 못 내는데 선생님이 ‘누군가 좋은 소리를 낸다’며 ‘누구냐’고 했다. “그때 선생님이 저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보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예쁜 소리’라고 하며, 간호사 하지 말고 성악가가 되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였다. 덕순은 꿈을 꾸었다. ‘성악가’라는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 이름은 그녀에게 꽃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박덕순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51년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했고, 어머니는 덕순이 네 살 되던 해에 새 삶을 찾아 떠났다.
“고운 한복을 입고 먼 곳으로 시집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봐버렸어요. 내가 밭고랑에 발이 빠지면서 엄마를 쫒아가며 울었던 기억이……. 엄마 얼굴은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장면이 생생해요. 내 나이 겨우 네 살이었는데…….”
“……….”
“할머니에게 ‘우리 엄마 언제 와? 보고싶어!’라고 하면 할머니는 날 붙잡고 하염없이 우셨어요.”
일찍 슬픔을 알아버린 덕순은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했다. 덕순은 할머니 인생의 해피엔드가 되고 싶었다. 얼른 졸업해 간호사로 돈을 벌어 할머니의 눈물도 닦아주고 싶었다.
순천 간호학교(현 청암대학)를 졸업하고 서울 마포 시립아동병원에 근무했다. 그때 덕순을 눈여겨보던 간호과장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덕순의 재능을 알고는 외국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당시 파독 간호사 붐이 일 때였다. 덕순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꼭 음악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면 심장이 아려왔다. 결국 용기를 내, 독일에 간다는 뜻을 비쳤을 때 할머니는 여장부처럼 덕순의 손을 꽉 잡았다.
“할머니는 ‘내 걱정은 말고 구라파 가서, 높은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더군요. 할머니는 자신이 못 배운 것이 늘 한이었거든요.”
1973년 박덕순(만 65세)은 파독 간호사 동료들과 함께 독일 남부지역인 슈바인포트에 도착했다.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음대 진학 준비를 했다. 하지만 슈바인 포트에는 음악대학이 없었다. 결국 1년 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독일 온 지 3년 만에 당당히 베를린 국립음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삶이 시작되는 곳에 벼랑이 있었다. 결핵에 걸려 6개월을 입원한 것. 덕순은, 폐에 문제가 생기면 노래한다는 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덕순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음대 합격 소식이었고, 가장 불행한 시간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았을 때다. 그때 불행과 행복은 인생의 한 끗 차이라는 역설의 미학을 실감했다. 외로운 이국 땅 병실에서 덕순은 자신이 왜 독일에 왔는가, 더듬어 보았다. 떠오르는 한 분, 할머니였다. 늘 덕순을 위해 기도하던 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났던 엄마를 통해 오히려 삶의 의욕이 생겼던 것처럼…….”
그렇게 희망은 지나온 고통의 언덕을 헤집으며 자라갔다. 아픔이 의욕의 담금질이 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주말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간호사로 일을 해, 87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꼬박꼬박 돈을 송금했다. 몸은 힘이 들었지만, 덕순은 이 시간을 그녀 인생의 ‘화양연화’로 꼽는다. 79년에 합창단 ‘콘체르트 코아’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편 에버하르트 모아씨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남편은 학생이었지만 이후 독일 공영방송에 직장을 얻었다. 그는 소프라노 박모아 덕순을 있게 한 장본인이자, 지금까지 공연활동의 숨은 외조자다.
그녀는 1989년 이래로 매년 최소 5번 이상의 독창회를 열고 있고, 독일 외에도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등에서도 연주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노르웨이 작곡가인 그리그 곡을 좋아해 노르웨이어까지 공부하는 열정을 보였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작곡가 하거룹 불과 연결되어 2002년에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열린 하거룹 불의 80세 생신축하 페스티벌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분에게서 ‘박모아 덕순에게 헌정’이라는 자필과 오리지널 악보를 헌정받기도 했다. 박모아 덕순은 2006년부터 특별한 활동을 시작했다.
“외국에 오래 살다보니 고향이 정말 그리웠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이 행사죠. 우리의 좋은 가곡을 제2의 고향인 독일에 나눠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조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독일 청중에게 알리겠다는 마음에 ‘한국 문화의 밤’ 행사를 기획했다. 공연의 청중은 90% 이상이 독일인이다. 매년 대보름 즈음에 열리는 공연에 미리 예매를 물어보는 매니아도 있다. 그들에게 덕순은 자신의 운명의 노래가 된 ‘동심초’를 들려주고, 우리 가곡이 들어간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독일인들로 구성된 ‘도라지 합창단’을 창단해, 독일인들에게 우리 가곡을 우리말로 부르게 하기도 했다.
덕순의 순수한 마음이 알려지면서 수익금도 생겼고, 전액을 뜻있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독일 수도원을 통해 북한 나진병원을 돕는 데도 팔을 걷어부쳤다. 나진은 특별경제지역으로 규정된 러시아 국경에 인접한 도시로, 독일 베네딕트 수도원이 2000년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개원을 했다. 이외에도 덕순은 한인회관 증축기금 마련에도 힘을 보태며 한인사회 친목과 소통에도 한 몫 하고 있다.
오는 19일에 열릴 ‘한국문화의 밤’은 10주년 기념행사로 치러진다. 그녀는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지만, 표정은 막 피어난 진달래처럼 해사하다.
“아, 봄이 오나봐요. 우리집 정원에 있는 진달래에 몽우리가 맺혀 있더라고요.”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 정원에 흐드러진 꽃들을 화폭에 담기도 한다. 2000년 한국의 모 잡지에 수기가 당선되어 한국 공영방송에도 출연해 그립던 엄마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구원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현재는 봄꽃이 한창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할머니에게 ‘우리 엄마 언제 와? 보고싶어!’라고 하면 할머니는 날 붙잡고 하염없이 우셨어요.”
일찍 슬픔을 알아버린 덕순은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했다. 덕순은 할머니 인생의 해피엔드가 되고 싶었다. 얼른 졸업해 간호사로 돈을 벌어 할머니의 눈물도 닦아주고 싶었다.
순천 간호학교(현 청암대학)를 졸업하고 서울 마포 시립아동병원에 근무했다. 그때 덕순을 눈여겨보던 간호과장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덕순의 재능을 알고는 외국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당시 파독 간호사 붐이 일 때였다. 덕순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꼭 음악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면 심장이 아려왔다. 결국 용기를 내, 독일에 간다는 뜻을 비쳤을 때 할머니는 여장부처럼 덕순의 손을 꽉 잡았다.
“할머니는 ‘내 걱정은 말고 구라파 가서, 높은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더군요. 할머니는 자신이 못 배운 것이 늘 한이었거든요.”
1973년 박덕순(만 65세)은 파독 간호사 동료들과 함께 독일 남부지역인 슈바인포트에 도착했다.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음대 진학 준비를 했다. 하지만 슈바인 포트에는 음악대학이 없었다. 결국 1년 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독일 온 지 3년 만에 당당히 베를린 국립음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삶이 시작되는 곳에 벼랑이 있었다. 결핵에 걸려 6개월을 입원한 것. 덕순은, 폐에 문제가 생기면 노래한다는 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덕순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음대 합격 소식이었고, 가장 불행한 시간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았을 때다. 그때 불행과 행복은 인생의 한 끗 차이라는 역설의 미학을 실감했다. 외로운 이국 땅 병실에서 덕순은 자신이 왜 독일에 왔는가, 더듬어 보았다. 떠오르는 한 분, 할머니였다. 늘 덕순을 위해 기도하던 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났던 엄마를 통해 오히려 삶의 의욕이 생겼던 것처럼…….”
그렇게 희망은 지나온 고통의 언덕을 헤집으며 자라갔다. 아픔이 의욕의 담금질이 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주말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간호사로 일을 해, 87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꼬박꼬박 돈을 송금했다. 몸은 힘이 들었지만, 덕순은 이 시간을 그녀 인생의 ‘화양연화’로 꼽는다. 79년에 합창단 ‘콘체르트 코아’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편 에버하르트 모아씨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남편은 학생이었지만 이후 독일 공영방송에 직장을 얻었다. 그는 소프라노 박모아 덕순을 있게 한 장본인이자, 지금까지 공연활동의 숨은 외조자다.
그녀는 1989년 이래로 매년 최소 5번 이상의 독창회를 열고 있고, 독일 외에도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등에서도 연주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노르웨이 작곡가인 그리그 곡을 좋아해 노르웨이어까지 공부하는 열정을 보였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작곡가 하거룹 불과 연결되어 2002년에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열린 하거룹 불의 80세 생신축하 페스티벌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분에게서 ‘박모아 덕순에게 헌정’이라는 자필과 오리지널 악보를 헌정받기도 했다. 박모아 덕순은 2006년부터 특별한 활동을 시작했다.
“외국에 오래 살다보니 고향이 정말 그리웠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이 행사죠. 우리의 좋은 가곡을 제2의 고향인 독일에 나눠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조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독일 청중에게 알리겠다는 마음에 ‘한국 문화의 밤’ 행사를 기획했다. 공연의 청중은 90% 이상이 독일인이다. 매년 대보름 즈음에 열리는 공연에 미리 예매를 물어보는 매니아도 있다. 그들에게 덕순은 자신의 운명의 노래가 된 ‘동심초’를 들려주고, 우리 가곡이 들어간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독일인들로 구성된 ‘도라지 합창단’을 창단해, 독일인들에게 우리 가곡을 우리말로 부르게 하기도 했다.
덕순의 순수한 마음이 알려지면서 수익금도 생겼고, 전액을 뜻있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독일 수도원을 통해 북한 나진병원을 돕는 데도 팔을 걷어부쳤다. 나진은 특별경제지역으로 규정된 러시아 국경에 인접한 도시로, 독일 베네딕트 수도원이 2000년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개원을 했다. 이외에도 덕순은 한인회관 증축기금 마련에도 힘을 보태며 한인사회 친목과 소통에도 한 몫 하고 있다.
오는 19일에 열릴 ‘한국문화의 밤’은 10주년 기념행사로 치러진다. 그녀는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지만, 표정은 막 피어난 진달래처럼 해사하다.
“아, 봄이 오나봐요. 우리집 정원에 있는 진달래에 몽우리가 맺혀 있더라고요.”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 정원에 흐드러진 꽃들을 화폭에 담기도 한다. 2000년 한국의 모 잡지에 수기가 당선되어 한국 공영방송에도 출연해 그립던 엄마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구원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현재는 봄꽃이 한창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