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빵장수가 꿈이었다
2026년 03월 05일(목) 00:20 가가
어려서 장래 희망은 빵장수였다. 물론 빵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빵은 대체식이나 간식이 아니라 밥을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빵을 실컷 먹는 게 소원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급식에서 빵을 주곤 했는데, 돈을 내지 못한 나는 먹지 못해서 속으로 울었다. 군대에서도 밥 대신 빵을 배급한다고 하니 싫어하는 동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빵이 싫다니!
한국인이 빵을 처음 접한 것은 조선 말기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소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외국인과 조선 상류층 사이에서 카스텔라 같은 서양과자가 진귀한 간식으로 통했다. 당시 카스텔라는 ‘눈처럼 희다’고 해서 ‘설고’라 불렸다. 물론 그 이전에 억류된 하멜이 빵을 구웠다는 기록이 있다. 빵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본의 양과자점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단팥빵·크림빵·소보로빵·술빵 등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유럽 원산이 아닌 일본식 빵이었다.
오늘날 한국어 ‘빵’이라는 단어 자체가 포르투갈어 ‘팡(Pao)’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데서 왔다. 해방 이후 일본인 빵집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한국인들이 제과제빵업계의 토대를 만들었고, 국내 최초의 빵집으로 알려진 이성당은 1920년 군산에 문을 열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거의 ‘현상’이라고 불러도 될 성심당 빵도 오랜 역사다. 빵은 단순히 물질적인 구조 이상의 초월적 존재다. 서양인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렇다.
빵 문화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6·25전쟁이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로 밀가루·분유·설탕이 대량 유입됐다. 한반도에서 밀은 원래 귀한 곡물이었다. 생산량이 적어 일반 가정에서 쉽게 먹을 수 없었던 밀가루가, 전후 원조 물자로 흘러들어오면서 비로소 대중식품의 원재료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50년대를 흔히 ‘삼백 산업’의 시대라 부르는데, 제분(밀가루)·제당(설탕)·면방직이 바로 그 세 가지였다. 전쟁이 현대 한국 식생활의 기반을 뒤바꾼 셈이다.
이 흐름을 국가 정책이 가속화했다. 1960년대를 전후해 정부는 ‘빵과 라면을 밥 대신 먹자’는 분식장려운동을 펼쳤다. 쌀 소비를 줄이고 원조 등으로 들여온 밀가루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옥수수빵과 분유 우유를 무료로 나눠줬고, 학교급식은 1972년까지 미국 원조 물자에 의존했다. 이 과정에서 빵은 어린이들의 입과 기억 속에 각인됐다. 정권은 밀가루 보급에 사활을 걸었다. 배고픔 해결은 독재정권의 불안한 입지와 관련이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는 삼립식품·샤니·크라운제과 등 양산형 제빵업체가 본격 등장했다. 공장에서 빵을 대량생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빵을 실은 리어카가 들어왔다. 치열한 경쟁도 벌였다. 이들은 미군이 제공하는 밀가루와 설탕을 받아 군대에 빵을 납품하면서 성장했고, 학교급식과 분식장려정책의 바람을 타고 전성기를 맞았다. 1960년 당시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은 13.8kg에 불과했지만 분식장려운동 이후 1970년에는 26.1kg, 1985년에는 32kg으로 급증했다.
서양과자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이후 서양과자가 처음 도입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관료들이 유럽산 과자를 먼저 맛보기는 했다. 양과자는 1920년대 이후 급속히 대중화됐다. 1960~70년대에는 값싼 밀가루와 정부의 분식장려 시책을 등에 업고 비스킷류가 간식의 주류가 됐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한과류가 주류였던 과자 문화가 불과 한두 세대 만에 완전히 바뀐 것이다.
현재 국내 제빵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약 11조 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공정거래위원회 분석 보고서 기준으로 양산빵 시장만 3조 9589억원이다. 편의점에서 연세우유 생크림빵이 1초에 1개씩 팔리던 시절, SPC삼립의 베이커리 부문 연결 매출은 9211억원에 달했고 전년 대비 10.8% 성장했다. 그 이면에는 노동자 홀대와 담합이 있었다. 어제 오늘 얘기도 아니다.한국인이 빵과 과자를 먹기 시작한 역사는 길어야 100년 남짓이다.
조선 말 카스텔라를 맛본 상류층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식 빵집으로, 전쟁 이후 원조 밀가루로, 분식장려운동과 학교급식으로, 공장 양산빵과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까지. 불과 몇 세대 안에 식생활의 근간이 달라졌다. 그렇게 중요한 음식이 됐다. 그걸 갖고 담합이나 하는 회사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매번 솜방망이 처벌이 자꾸 재범을 부추긴 것이 아닐까 싶다. 빵에는 순정과 사랑이 있다는데, 파렴치한 일이 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음식 칼럼리스트>
이 흐름을 국가 정책이 가속화했다. 1960년대를 전후해 정부는 ‘빵과 라면을 밥 대신 먹자’는 분식장려운동을 펼쳤다. 쌀 소비를 줄이고 원조 등으로 들여온 밀가루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옥수수빵과 분유 우유를 무료로 나눠줬고, 학교급식은 1972년까지 미국 원조 물자에 의존했다. 이 과정에서 빵은 어린이들의 입과 기억 속에 각인됐다. 정권은 밀가루 보급에 사활을 걸었다. 배고픔 해결은 독재정권의 불안한 입지와 관련이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는 삼립식품·샤니·크라운제과 등 양산형 제빵업체가 본격 등장했다. 공장에서 빵을 대량생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빵을 실은 리어카가 들어왔다. 치열한 경쟁도 벌였다. 이들은 미군이 제공하는 밀가루와 설탕을 받아 군대에 빵을 납품하면서 성장했고, 학교급식과 분식장려정책의 바람을 타고 전성기를 맞았다. 1960년 당시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은 13.8kg에 불과했지만 분식장려운동 이후 1970년에는 26.1kg, 1985년에는 32kg으로 급증했다.
서양과자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이후 서양과자가 처음 도입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관료들이 유럽산 과자를 먼저 맛보기는 했다. 양과자는 1920년대 이후 급속히 대중화됐다. 1960~70년대에는 값싼 밀가루와 정부의 분식장려 시책을 등에 업고 비스킷류가 간식의 주류가 됐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한과류가 주류였던 과자 문화가 불과 한두 세대 만에 완전히 바뀐 것이다.
현재 국내 제빵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약 11조 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공정거래위원회 분석 보고서 기준으로 양산빵 시장만 3조 9589억원이다. 편의점에서 연세우유 생크림빵이 1초에 1개씩 팔리던 시절, SPC삼립의 베이커리 부문 연결 매출은 9211억원에 달했고 전년 대비 10.8% 성장했다. 그 이면에는 노동자 홀대와 담합이 있었다. 어제 오늘 얘기도 아니다.한국인이 빵과 과자를 먹기 시작한 역사는 길어야 100년 남짓이다.
조선 말 카스텔라를 맛본 상류층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식 빵집으로, 전쟁 이후 원조 밀가루로, 분식장려운동과 학교급식으로, 공장 양산빵과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까지. 불과 몇 세대 안에 식생활의 근간이 달라졌다. 그렇게 중요한 음식이 됐다. 그걸 갖고 담합이나 하는 회사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매번 솜방망이 처벌이 자꾸 재범을 부추긴 것이 아닐까 싶다. 빵에는 순정과 사랑이 있다는데, 파렴치한 일이 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음식 칼럼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