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AI페퍼스가 잃은 것들 - 윤영기 체육부 부국장
2023년 06월 07일(수) 00:00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한 장면. 지난 4월 27일 피츠버그가 LA다저스에 8-1로 앞선 8회 말 1사 후 팬들의 갈채를 받으며 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드루 매기(33). 다저스 불펜 투수 알렉스 베시아가 던진 초구를 받아쳤으나 파울이 됐다. 이어 타석을 벗어나 호흡을 가다듬다 ‘피치 클록’(pitch clock) 위반으로 스트라이크 한 개를 더 먹었다. 매기에게 ‘피치 클록’ 위반이 선언되자 홈팬들은 심판을 야유했다. 매기가 삼진을 먹고 타석을 떠난 뒤에도 팬들은 한참 동안 박수를 보냈다. 데뷔 후 13년 동안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매기의 메이저 리그 데뷔 무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감독과 구단의 배려가 감동을 만들어 낸 장면이다.

새삼 피츠버그 구단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광주 AI페퍼스 배구단이 단행한 트레이드가 뇌리를 스친다. 페퍼스 배구단이 최근 세터 이고은(28)을 재영입했다. 엿새 만에 벗겼던 유니폼을 다시 입혔다. 페퍼스가 한국도로공사에서 아웃사이드 히터(레프트) 박정아를 영입한 뒤 보호 선수 명단에서 이고은을 뺀 것이 사달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웬 떡이냐’며 이고은을 트레이드 보상 선수로 데려갔다. 김종민 한국도로공사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보호 선수 명단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주전 세터를 풀어 줬다. 의외의 선택지였다”고 밝힐 정도였다.

방출 선수 엿새 만에 다시 영입

팬들은 의아했지만 ‘대책이 있겠거니’ 했다. 대책 없었다는 사실은 이고은을 다시 데려오면서 드러났다. 출혈이 컸다. 미래 자원인 미들 블로커(센터) 최가은(22)과 2023-2024시즌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헌납하는 댓가를 치렀다. 누가 봐도 밑지는 장사를 했음에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프로 스포츠계에서 트레이드는 비정하다. 프로 야구에서는 당일 트레이드를 통보받고 방출된 선수가 마음 추스를 겨를도 없이 그날 곧바로 이적팀에서 뛰는 경우도 허다하다. 페퍼스가 단행한 이고은 트레이드는 결이 많이 다르다. 팀 전력 강화를 위해 지난해 3월 FA(자유계약)로 영입한 선수를 다시 친정팀에 보냈다. 그런데 타 팀에 내줘도 되는 선수가 엿새 만에 다시 필요한 선수가 되는 기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이고은은 충격과 상처를 다스릴 시간도 없었다. 이고은 트레이드는 선수들에게 부정적인 시그널이다. 구단 입맛에 따라 언제든 감탄고토(甘呑苦吐) 신세가 되리라는. 페퍼스가 이고은 트레이드로 내상을 입은 선수들에게 원팀 정신과 헌신을 요구할 수 있을까.

트레이드 사태 수습 과정에서도 구단의 행보는 낙제점이다. 페퍼스는 이고은을 다시 데려오면서 보도자료에 이렇게 썼다. “이고은 선수 영입을 통해 베테랑의 힘을 더하는 동시에 세터 운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틀렸다.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다. 그 흔한 ‘유감’이라는 표현 정도는 해야 맞다. 구단이 “이고은은 보호해야 할 선수 순위에서 밀렸다”고 언급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고은은 자신의 인스타 그램에서 마음을 꾹꾹 눌러 쓴 글을 올렸다. “정신이 조금 없었습니다. 선수는 어떠한 상황이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경기 보여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걱정해 주신 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알량한 구단보다 이고은이 더 의젓하다.

원칙과 철학 없는 구단 운영

지난해 리베로 오지영 트레이드 건도 팬심과 정반대였다. GS칼텍스는 ‘오지영을 페퍼스와 GS칼텍스 경기에 내보내지 말라’는 트레이드 조건을 제시했다. 원죄는 GS칼텍스에 있지만 페퍼스는 납득하기 어려운 오지영 출장 금지 조항을 수용했다. 선수 권리 침해라는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계약을 충실히 이행해 오지영은 GS칼텍스전 세 게임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팀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그런 계약을 했겠냐’는 동정론도 있다. 바닥을 헤매고 있는 팀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선수 마음을 헤아리고 신생 구단의 이미지를 고려했다면 이런 계약은 하지 않았어야 옳다. 구단은 한국배구연맹의 검토 결과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정돼 합의했다고 밝혔다. 맞는 말이다. 항상 문제는 법과 상식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법에 저촉되지 않은 행위가 무슨 죄냐’고 항변하는 인사들에게 국민들이 공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퍼스는 법과 규정에 없더라도 팬의 눈높이와 상식으로 판단할 내용에서 품격과 정체성을 폭로하고 말았다. 광주 AI페퍼스 팬들은 묻고 있다. 페퍼스에 원칙과 철학은 있는가.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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