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리고 ‘역사’를 위해- 두 죽음에 부쳐 - 노영기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1년 11월 29일(월) 04:00 가가
그자가 죽었다! 허망하다!
아직 한 가지도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는데, 씻을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죄를 지은 자가 평안하게 집에서 ‘자연사’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화타를, 허준을, 이제마를 불러내 자연으로 돌아간 그자를 되살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 들어야 할 말이 많고, 풀고 가야 할 게 산맥을 휘감은 칡뿌리처럼 엉켜 있다. 그런데 죽음과 침묵이 그 모든 걸 삼켜버렸다. 제대로 죗값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 그 모든 책임을 어두운 침묵 속에 묻어 버렸다.
자꾸 그자의 공과(功過)를 들먹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면, 그자가 지은 죄를 살펴보자. 10·26 이후 유신의 폭압 아래서 없어진 인권과 민주, 자유의 가치가 살아나던 때에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과 일상을 철저하게 부숴버린 자다. 권력을 잡겠다고 전방의 군대를 서울로 빼돌려 ‘국가 안보’를 위기에 빠뜨린 자다. 정권을 잡기 위해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잡아들이고 임무에 충실했던 부하이자 후배인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을 죽이고 그 가족들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자다. 초여름 어느 일요일 평화로운 빛고을을 폭력과 야만, 살육의 피로 물들이고 공포의 사슬로 묶은 자다. 오죽하면 5·18을 겪은 광주 시민들이 헬기 소리에 겁을 먹고 다시 틀어진 도청 앞 분수를 멈추라 했을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에게 총칼을 쥐어주고 마치 전쟁터에서 적국의 도시를 점령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 자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자 진실을 말한 언론인들을 현장에서 내쫓은 자다. 난데없이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 삼청교육대로 보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끝자락으로 내몰았던 자다. 불교계를 정화한다며 사찰에 군홧발 자국을 새기고도 뻔뻔하게 백담사로 도망친 자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학생들을 군대에 가둬 놓고 동료를 팔도록 하고 끝내는 목숨을 내던지게 만든 자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고문이 당연하다는 듯이 일상처럼 행해졌다. 돌아가신 김근태 장관은 한 달여 동안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짐승’처럼 고문당하고, 권인숙 의원은 부천의 경찰서에서 성 고문을 당했다. 대한민국을 ‘최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나라’로 떨어뜨린 자다. 이런 자를 전직 대통령이라고, 용서와 화해를 운운하는 건 역사에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는 짓이다. 용서와 화해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이다. 대체, 그자가 언제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고 사죄한 적이 있단 말인가? 그런 자를 위한 향불도 아깝다.
한번 따져 보자.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화해한단 말인가? 올해 옛 전남도청 복원추진단은 노먼 소프의 사진과 필름을 기증받았다. 사진 속에는 41년 전 5월 27일 새벽 광주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쓰러져 간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을 법한 어린 학생들, ‘소년이 온다’의 그 소년들이 피 흘린 채로 옛 전남도청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때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 소년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자가 죽기에 앞서 한 분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41년 전 스님이었던 그분은 5·18 당시 부상자를 부축하다 총에 맞아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몸에 새기고 사셨다. 그날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라시다가 세상을 등지신 게 오늘의 비극이다. 이 참혹한 역설 속에서 어찌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있을까? 먼저 가신 오월의 영령들이, 지금도 죽음보다 더한 아픔과 싸우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분들이 꺼내기 전에는 용서와 화해를 입에 올리지 말라.
이제는 ‘역사’ 속에 묻자고 가벼이 말하지 말라. ‘역사’는 그리 가볍고 따사롭지 않다. ‘가을 찬서리’(秋霜)보다 차갑고 따가운 햇살보다 강렬한 게 ‘역사’이다. 따사로운 ‘역사’는 41년의 고통과 그 무게를 껴안은 채 목숨을 내던진 분이나 지금까지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어울린다. 수많은 죄악을 침묵 속에 묻어 버린 자를 위한, 자신과 그 족속들의 호의호식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부순 자를 위한 ‘역사’는 없다.
아직 한 가지도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는데, 씻을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죄를 지은 자가 평안하게 집에서 ‘자연사’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화타를, 허준을, 이제마를 불러내 자연으로 돌아간 그자를 되살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 들어야 할 말이 많고, 풀고 가야 할 게 산맥을 휘감은 칡뿌리처럼 엉켜 있다. 그런데 죽음과 침묵이 그 모든 걸 삼켜버렸다. 제대로 죗값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 그 모든 책임을 어두운 침묵 속에 묻어 버렸다.
한번 따져 보자.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화해한단 말인가? 올해 옛 전남도청 복원추진단은 노먼 소프의 사진과 필름을 기증받았다. 사진 속에는 41년 전 5월 27일 새벽 광주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쓰러져 간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을 법한 어린 학생들, ‘소년이 온다’의 그 소년들이 피 흘린 채로 옛 전남도청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때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 소년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자가 죽기에 앞서 한 분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41년 전 스님이었던 그분은 5·18 당시 부상자를 부축하다 총에 맞아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몸에 새기고 사셨다. 그날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라시다가 세상을 등지신 게 오늘의 비극이다. 이 참혹한 역설 속에서 어찌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있을까? 먼저 가신 오월의 영령들이, 지금도 죽음보다 더한 아픔과 싸우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분들이 꺼내기 전에는 용서와 화해를 입에 올리지 말라.
이제는 ‘역사’ 속에 묻자고 가벼이 말하지 말라. ‘역사’는 그리 가볍고 따사롭지 않다. ‘가을 찬서리’(秋霜)보다 차갑고 따가운 햇살보다 강렬한 게 ‘역사’이다. 따사로운 ‘역사’는 41년의 고통과 그 무게를 껴안은 채 목숨을 내던진 분이나 지금까지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어울린다. 수많은 죄악을 침묵 속에 묻어 버린 자를 위한, 자신과 그 족속들의 호의호식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부순 자를 위한 ‘역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