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남행 열차
2021년 02월 23일(화) 05:00 가가
열차는 밤에 타야 제맛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절처럼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지친 사람들의 표정은 한없이 무겁다. 깜깜한 어둠 속을 질주하는 기차에서 어쩌면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혼돈 속으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지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 마지막 장면이 기차인 경우가 많다. 폭주하는 기차, 어둠, 그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스릴 만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끝 모를 어딘가로 가는 절박한 심정과 병치시키기에 맞춤이다. 그래서 여행할 때면 일부러 밤 열차를 탄다. 삶이 지루해서 졸릴 때면 기차처럼 폭주해 보고 싶고, 누군가가 미치도록 보고 싶으면 요란한 기적소리처럼 차창 밖으로 목이 터지도록 그 사람을 호명해 보고 싶어 밤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 옛날, 배고픈 첫째를 싣고 떠난 남행열차는 둘째가 크자 방직공장으로 싣고 갔다. 두바는 시바를 동대문시장 장터 꾼으로, 시바는 니다니를 신림동으로 오다니를 청량리로 데려갔다.(두바는 둘째 아들, 시바는 셋째 아들, 니다니는 넷째 딸, 오다니는 다섯째 딸을 뜻하는 진도 토속어이다) 어머니만 홀로 남겨두고 모두 데려간 남행열차, 난 그 남행열차를 탄다. 그래서인지 열차를 탈 때면 절로 슬퍼진다. 기차는 칸마다 낭만과 귀향의 꿈을 싣고 달린다는데, 유독 남행열차는 슬픔을 싣고 달렸던 것 같다. 슬픔의 무게 탓일까. 느릿느릿 가는 남행열차에는 가난과 서러움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 같다.
84년 초여름 광주역에서 입영열차를 탔었다. 몇 해 전 5월, 전남대에서 총알을 피해 광주역 철로 사이로 허겁지겁 도망쳤던 내가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총을 들려고 간다는 게 참으로 서글펐다. 그래서 군대 생활 내내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는 김수희의 ‘애모’를 따라 부르며 슬픔을 붙잡았다. 우리 부대원들도 구슬픈 애모를 군가처럼 씩씩하게(?) 따라 불렀다. 남행열차는 그때, 나온 노래이다. ‘비 내리는 호남선’이나 ‘목포의 눈물’과 가사는 유사하나 리듬은 빠르고 경쾌하다. 슬픈 내용을 밝은 율동으로 잘 감춘 노래다.
그래서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얼큰하게 취하면 누구 할 것 없이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하면서 목이 터지도록 남행열차를 불렀다. 막걸리집에서 자취방에서 심지어 야구장에서조차 남행열차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남행열차에는 서정적 소재가 칸칸이 실려 있다. 비, 기적소리, 흔들림, 눈물, 만날 수 없는 사랑까지 통속적 어휘는 모두 싣고 달린다. 삶이란 통속적인지 모른다. 눈물과 사랑이 없는 삶이 어디 진짜 삶인가.
어떤 사랑이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했고, 다시 만날 수 없고,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구슬프다.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세레나데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는 연인, 아니 5월이 남행열차 노래에 깨어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무얼 하느냐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만큼이나 오랫동안 침묵했고, 치열하게 싸웠기에 많이도 죽었고, 너무도 사랑했기에 철저히 미움을 받았던 5월,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만날 순 없어도, 만날 순 없어도… .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만날 수 없으며, 잃어버린 첫사랑은 어쩌면 5월의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린 모두 목이 메도록 부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 많던 금지곡 속에 낄 법도 한데, 너무 평범한 대중가요로 위장을 해서, 그들의 총칼을 피해 시민들 속에 위장해 있는 시민군 같기도 하다. 하여간 웃어도 웃음이 아니고 울어도 눈물이 아닌 노래가 있다면 남행열차일 것이다. 몸을 흔들어도 춤이 아니고, 웃어도 즐겁지 않은, 아무리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도 저절로 터져 나오는 노래, 남행열차는 또 다른 남도의 노래, 오월의 노래는 아니었을까.
악다구니를 쓰며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남행열차는 노래가 아닌 몸짓이고 몸짓이기 전에 사랑이었다. ‘만날 수 없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 말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얼큰하게 취하면 누구 할 것 없이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하면서 목이 터지도록 남행열차를 불렀다. 막걸리집에서 자취방에서 심지어 야구장에서조차 남행열차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남행열차에는 서정적 소재가 칸칸이 실려 있다. 비, 기적소리, 흔들림, 눈물, 만날 수 없는 사랑까지 통속적 어휘는 모두 싣고 달린다. 삶이란 통속적인지 모른다. 눈물과 사랑이 없는 삶이 어디 진짜 삶인가.
어떤 사랑이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했고, 다시 만날 수 없고,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구슬프다.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세레나데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는 연인, 아니 5월이 남행열차 노래에 깨어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무얼 하느냐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만큼이나 오랫동안 침묵했고, 치열하게 싸웠기에 많이도 죽었고, 너무도 사랑했기에 철저히 미움을 받았던 5월,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만날 순 없어도, 만날 순 없어도… .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만날 수 없으며, 잃어버린 첫사랑은 어쩌면 5월의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린 모두 목이 메도록 부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 많던 금지곡 속에 낄 법도 한데, 너무 평범한 대중가요로 위장을 해서, 그들의 총칼을 피해 시민들 속에 위장해 있는 시민군 같기도 하다. 하여간 웃어도 웃음이 아니고 울어도 눈물이 아닌 노래가 있다면 남행열차일 것이다. 몸을 흔들어도 춤이 아니고, 웃어도 즐겁지 않은, 아무리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도 저절로 터져 나오는 노래, 남행열차는 또 다른 남도의 노래, 오월의 노래는 아니었을까.
악다구니를 쓰며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남행열차는 노래가 아닌 몸짓이고 몸짓이기 전에 사랑이었다. ‘만날 수 없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