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현(義自見)
2021년 01월 25일(월) 23:00 가가
“그게 공로상이 맞지, 왜 작품상이야”
문학 동우회 시상식 뒤풀이 자리였다. 시상식 후에는 늘 작품 뒤에 수상자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작가정신과 작품성을 갖춘 작가인지라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술자리는 개운한 자리가 되지 못했다. 낯을 붉히기 전에 먼저 슬그머니 일어섰다.
새해가 제법 지났건만 올해도 여전히 조용할 날이 없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다투고, 남녀가 서로 편을 갈라 다툰다. 병실이 부족하고 자영업자들은 죽겠다고 하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몰래 모여 자기들만 구원을 얻겠다고 한다. 거기에 선거가 겹쳐서인지 진보와 보수가 상대를 비방하느라 악다구니를 질러댄다. 욕 잔치나 헐뜯기 대회를 보는 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검사나 의사들의 한심한 작태에 화가 치민데다 가장 못난 정치인과 국회의원까지 뽑은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 따뜻한 이야기는 그들의 고성에 가려 판도라 속에나 있을 성싶다.
겨울비라도 오려는지 밖은 마음처럼 희끄무레하다. 지구 끝에 선 것인 양 답답하다. 집까지 가려면 제법 밀릴 것 같다. 붕어빵을 몇 개 넣고 얼마를 가니 요금소다. 잔돈을 받고 붕어빵 하나를 건네는데,
“월척 낚으셨나 봐요?”
아주머니가 환히 웃으며 새해 인사를 건넌다. 밝게 웃는 얼굴이 힘차다. 모두 아파트값 인상으로 아우성인데, 통행료 요금을 받는 곳만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인가 보다. 아니 교도소라고 여겼는데, 저기만 이상향(nowhere)이나 샹글릴라(Shangri-la) 같다. 모두 협소하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이 보이는 곳인데 저리 평온이 있을까. 일에 몰두하기 때문일까. 공간보다 생계가 절실하기 때문일까. 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 순간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미국 어느 통행료 징수대에서 파티를 열고 있는 사내 이야기였다. ‘사흘도 지겨워서 못 견딜 그런 좁은 공간 안에서, 난 혼자만 쓸 수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는 셈이고, 또한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산들을 구경하며 월급을 받는다’며 짬짬이 신나게 춤 연습을 하는 사내의 이야기,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다.
순간 그 아주머니가 장자로 보였고, 문학상 하나 가지고 낯을 붉힌 친구와 나는 달팽이 뿔 위에서의 목숨을 걸고 싸운 속 좁은 사내들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쩜 수많은 병아리들이 서로 다르다고 뽐을 내지만 우리가 보기엔 똑같은 병아리인 것처럼, 아웅다웅 다투는 백인이나 흑인, 유색인종도 먼 곳에서 보면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하물며 깨알보다 작은 것 가지고 허구한 날 마주치면 싸우는 인간들을 어떤 존재가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얼마나 개탄스러울까.
얼마 전 살던 곳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전망을 가린다고 이사를 했다. 고작 그 작은 것조차 방해물로 여긴 나를 아주머니가 알게 되면 나 역시 달팽이보다 더 한심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실상 나도 저 아주머니 마음을 이제 헤아릴 것 같다. 이사한 덕분에 난생 처음 작은 서재를 얻었다. 옷장 옆에 한 평 남짓 공간에 마련한 서재이다. 의젓하게 서재 이름까지 지어 팻말을 달았다. 의자현, 백제의 의자왕이냐고들 하지만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에서 땄다. 오는 손님마다 어찌 이런 토굴 같은 곳에서 사느냐고 웃지만 지금껏 좁다고 여긴 적이 없다. 퇴근 후, 이곳에서 세 시간은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고, 오랫동안 계속해 내리는 비는 한 때의 여가(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라는 말처럼 책 읽으며 세 가지 여가(三餘)로 훌쩍 보낸다. 내 상상의 공간, 한 평은 이 세상보다 광활하다.
요금소 아주머니와 사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만면에 미소를 띠고 느긋하게 귀가한다. 그리 보면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좁고 넓음을 눈으로 측정하는 자는 하수이다. 장자처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읽어야 고수다.
누군가에겐 바다도 물 한 컵보다 작고, 우리 인생이 부싯돌 불빛 같이 찰나에 불과할지언정, 난 지금 의자현이 이 광활한 우주보다 더 넓다.
문학 동우회 시상식 뒤풀이 자리였다. 시상식 후에는 늘 작품 뒤에 수상자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작가정신과 작품성을 갖춘 작가인지라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술자리는 개운한 자리가 되지 못했다. 낯을 붉히기 전에 먼저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주머니가 환히 웃으며 새해 인사를 건넌다. 밝게 웃는 얼굴이 힘차다. 모두 아파트값 인상으로 아우성인데, 통행료 요금을 받는 곳만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인가 보다. 아니 교도소라고 여겼는데, 저기만 이상향(nowhere)이나 샹글릴라(Shangri-la) 같다. 모두 협소하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이 보이는 곳인데 저리 평온이 있을까. 일에 몰두하기 때문일까. 공간보다 생계가 절실하기 때문일까. 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 순간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미국 어느 통행료 징수대에서 파티를 열고 있는 사내 이야기였다. ‘사흘도 지겨워서 못 견딜 그런 좁은 공간 안에서, 난 혼자만 쓸 수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는 셈이고, 또한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산들을 구경하며 월급을 받는다’며 짬짬이 신나게 춤 연습을 하는 사내의 이야기,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다.
순간 그 아주머니가 장자로 보였고, 문학상 하나 가지고 낯을 붉힌 친구와 나는 달팽이 뿔 위에서의 목숨을 걸고 싸운 속 좁은 사내들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쩜 수많은 병아리들이 서로 다르다고 뽐을 내지만 우리가 보기엔 똑같은 병아리인 것처럼, 아웅다웅 다투는 백인이나 흑인, 유색인종도 먼 곳에서 보면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하물며 깨알보다 작은 것 가지고 허구한 날 마주치면 싸우는 인간들을 어떤 존재가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얼마나 개탄스러울까.
얼마 전 살던 곳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전망을 가린다고 이사를 했다. 고작 그 작은 것조차 방해물로 여긴 나를 아주머니가 알게 되면 나 역시 달팽이보다 더 한심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실상 나도 저 아주머니 마음을 이제 헤아릴 것 같다. 이사한 덕분에 난생 처음 작은 서재를 얻었다. 옷장 옆에 한 평 남짓 공간에 마련한 서재이다. 의젓하게 서재 이름까지 지어 팻말을 달았다. 의자현, 백제의 의자왕이냐고들 하지만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에서 땄다. 오는 손님마다 어찌 이런 토굴 같은 곳에서 사느냐고 웃지만 지금껏 좁다고 여긴 적이 없다. 퇴근 후, 이곳에서 세 시간은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고, 오랫동안 계속해 내리는 비는 한 때의 여가(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라는 말처럼 책 읽으며 세 가지 여가(三餘)로 훌쩍 보낸다. 내 상상의 공간, 한 평은 이 세상보다 광활하다.
요금소 아주머니와 사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만면에 미소를 띠고 느긋하게 귀가한다. 그리 보면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좁고 넓음을 눈으로 측정하는 자는 하수이다. 장자처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읽어야 고수다.
누군가에겐 바다도 물 한 컵보다 작고, 우리 인생이 부싯돌 불빛 같이 찰나에 불과할지언정, 난 지금 의자현이 이 광활한 우주보다 더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