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할매 작가’
2019년 11월 19일(화) 04:50
꽃다운 소녀 시절엔 꿈이 있었다. 하지만 가난해서, 또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 때부터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면서,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이 운동회에서 달리기 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부러웠다. 그렇게 꿈을 펼쳐 보지 못했고, 평생 못 배운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소녀들은 할머니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순천시 ‘시립 그림책도서관’에서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글을 알고부터 행복했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직접 쓸 수 있게 됐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등학생이 되어 날마다 숙제하고 구구단을 외우느라 바쁩니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적을 수 있게 됐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자녀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수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쓰고 읽으면서 함께 울었다. 83세에 ‘성인 문해 골든벨’에 참가해 우승을 하면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할머니도 있다. 할머니들은 ‘용기를 내’ 그림도 배웠다. 그리고 3년 후. 살아 온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 지난 2월 그림일기를 펴냈다. 할머니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책 제목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이다.

순천 ‘할매 작가’ 20명의 글뿐만 아니라 그림을 원화(原畵)로 볼 수 있는 ‘인생을 담은 그림책’ 전시회가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문화원 내 어린이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다. 할머니 작가들은 가슴 아픈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글과 그림 속에 풀어냈는데, 이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 세대’의 자화상일 것이다.

할머니들은 ‘공부가 큰 선물’이었다며 ‘앞으로의 소원도 건강하게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전시를 본 초등학생들도 ‘예쁘고 꽃 같아. 건강하세요’ 등의 응원 메시지를 남겼다.

잠시 짬을 내 ‘마음만은 꽃다운 소녀’인 할매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전시는 12월 1일까지.

/송기동 문화2부장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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