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8>] 바흐 창조적 음악, 신이 되려한 추상화가들 구원하다
색 해체 포비즘, 형태 해체한 큐비즘
모방을 포기한 작가들 색다른 실험
음악의 편집방법론 ‘대위법’ 활용
바우하우스서 새 창조 원동력으로
20세기 초반 ‘바흐 르네상스’ 구현
1 2 1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교회의 바흐 동상. 바흐의 대위법은 출구가 막힌 추상화가들에게 구원이었다.
2019년 11월 08일(금) 04:50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한다. 개뻥이다! 독일에서 십여 년 살았지만 그곳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나 해서 독일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봤다. ‘Bach’와 ‘Vater der Musik’은 연관 검색어로 찾아지지 않는다. 총 20명의 자녀를 둔 ‘엄청난 정력의 아버지’로는 검색된다. 더 웃긴 것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음악의 삼촌’은 누구고, ‘음악의 이모’는 누구인가.

오늘날에는 바흐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1750년 사망한 바흐는 1829년 20살의 멘델스존이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을 연주할 때까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작품이 연주된 적도 거의 없었다.

헨델은 달랐다. 당대는 물론 사후에도 탁월한 음악가로 기억되었다. 바흐는 19세기 초반의 이른바 ‘바흐 르네상스(Bach-Renaissance)’를 통해 가장 ‘독일적인 음악가’로 재탄생했다. 여기에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늦은 근대화 과정을 겪었던 독일이 ‘문화(Kultur)’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려 했던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독일에서 ‘문화’ 개념은 특별하다. ‘일상문화’가 아닌 ‘고급문화’를 의미한다. 음악이야말로 이 ‘고급문화’를 대표한다. 오늘날 독일의 작곡가들이 서양 고전음악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바로 후발 근대국가인 독일의 적극적 문화마케팅의 결과다.

그런데 20세기 초반, 또 다른 ‘바흐 르네상스’가 일어난다. ‘모방’과 ‘재현’을 포기하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화가들에 의해서다(20세기 초반의 ‘바흐 르네상스’는 내 표현이다. 문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반의 바흐 르네상스보다 훨씬 중요하다). 신 없는 세계를 스스로 ‘창조’해야 했던 고단한 화가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한줄기 빛이었다. 20세기 초반, 추상화가들이 바흐에게 의지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

‘모방’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화가들 앞에 놓은 길은 두 개였다. 형태를 해체할 것인가, 색을 해체할 것인가.

시작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이끄는 프랑스의 ‘포비즘(fauvisme·야수파)’이었다. ‘야수(野獸)적’이란 표현 그대로, 색을 거칠고 공격적으로 사용해 색의 해체를 시도했다. 얼굴을 파란색으로 칠한다든지, 하늘을 노랗게 칠하는 것처럼 실제 대상의 색과는 전혀 다르게 색칠하는 방식이다. 1905년에 나타난 ‘야수파’는 하나의 분파라고 하기에는 지속기간이 너무 짧았다. ‘야수파’라는 이름으로 화가들은 불과 3년 남짓 활동했다. 색의 해체라는 실험도 곧 지루해졌다. 그러나 독일의 ‘다리파’, ‘청기사파’가 야수파의 뒤를 이어 ‘색의 해체’ 실험을 계속했다.

내심 마티스와 경쟁하던 피카소(Pablo Picasso)는 ‘형태의 해체’로 방향을 틀었다. ‘큐비즘(cubisme·입체파)’이다. 대상을 해체해 ‘입방체(cube)’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큐비즘’이란 이름은 마티스가 붙였다. 마티스와 함께 ‘색의 해체’에 참여했던 브라크가 피카소 쪽으로 돌아서자, 맘이 불편했던 마티스는 브라크의 그림을 ‘큐브적’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피카소도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일 자신이 없었다. 대상의 재현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형태의 해체’라는 큐비즘의 실험은 네덜란드의 ‘데스틸(De Stijl)’이나 러시아의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던 포비즘의 ‘색의 해체’와 큐비즘의 ‘형태의 해체’라는 실험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집중적으로 시도됐다. 색채에 집중하는 표현주의자들과 형태에 집중하는 구성주의자들이 바우하우스의 선생으로 초빙됐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당시 모든 아방가르드 예술 방법론의 깔때기였다.

그러나 신처럼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서구 회화의 전통 내에서는 새로운 창조의 방법론을 도무지 찾아낼 수는 없었다. 지친 화가들은 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음악은 대상을 모방하지 않고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아주 그럴듯하게 창조하고 있었다. 특히 바흐는 음악의 구성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음악을 그림만큼이나 사랑했던 화가들은 바흐의 방법론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의 ‘바흐 르네상스’는 자신들이 신이 되고자했던 화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바우하우스 예술교육의 기초를 닦은 요하네스 이텐은 그림을 그리기 전 바흐의 2성부 ‘푸가’인 ‘인벤션’을 꼭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림2>는 이텐이 스스로 바흐 음악의 방법론, 즉 푸가와 인벤션에 영감을 받아 1916년에 그린 ‘바흐 가수(Bachs nger)’라는 그림이다. 바흐의 대위법을 색의 다양한 조합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바흐 ‘창조 방법론’의 핵심은 ‘편집’

‘푸가(Fuge)’란 ‘폴리포니(polyphony·다성부 음악)’를 창작하는 대위법의 한 방법론이다. 간략히 개념만 설명하자면 이렇다. 서양 음악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이 하나의 성부로 연주하는 단선율의 음악에서 다양한 선율이 서로 편집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때 자칫하면 혼란스러워지기 쉬운 멜로디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한 음악가들의 깊은 고민의 결과가 바로 ‘폴리포니’다.

‘대위법’이란 폴리포니에서 각 성부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반복되는 방식을 뜻한다. 음악에서만이 가능한 ‘자기복제’의 방식이다. 모방하지만 외부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고 스스로를 모방한다는 이야기다. ‘푸가’나 ‘카논’은 이 대위법의 한 양식을 뜻한다. 바흐는 이 같은 대위법이라는 음악의 창조 방법론,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음의 ‘편집 방법론’ 발전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바흐가 죽기 직전까지 몰두한 작품이 바로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이다. 음악편집방법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흐는 음악이 어떻게 편집되는가를 가장 자세하고 친절하게 보여준 음악가였다. 그래서 바흐를 ‘천재’라고 하지 않는 거다. 천재는 자기 혼자만 잘난 사람이다.

바흐의 ‘창조방법론’, 즉 ‘대위법’이라는 ‘편집방법론’의 가치를 바우하우스의 화가들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재현과 모방을 거부한 20세기 초반의 추상화가들에게 외부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음악에 내재한 수학적 법칙과 논리에 바탕을 두고 창조를 가능케 한 바흐의 대위법은 구원이었다. 이텐은 바흐가 대위법의 다양한 규칙에 따라 음악을 만들었듯 색의 구조원리를 파헤치고 싶었다. 빨강·파랑·노랑의 기본 색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서로 대립 혹은 조화하며 12가지 색으로 확장해가는 이텐의 색환 <그림3>은 바흐의 ‘편집방법론’의 색채학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바우하우스 시절부터 시작한 이 방법론적 고민을 이텐은 1961년이 되어서야 완성했다). 빨강의 보색은 초록(파랑+노랑), 노랑의 보색은 보라(파랑+빨강), 파랑의 보색은 주황(빨강+노랑)이 된다. 이렇게 3가지 기본 색이 규칙에 따라 확장을 계속해서 12가지 색으로까지 분화한다. 색도 이렇게 음악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바흐 대위법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12음 기법’이라는 새로운 폴리포니 ‘편집방법론’을 개발했던 쇤베르크가 바우하우스 선생들과 가깝게 지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텐을 도와 기초과정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게르트루드 그루노우(Gertrud Grunow)는 아예 쇤베르크의 12가지 음을 색과 기하학적 형태와 연결시키는 공감각적 색환을 만들기도 했다.

이텐과 그루노우는 1924년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그러나 바흐 편집방법론과 근대디자인의 본격 결합은 바우하우스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칸딘스키와 클레를 통해 지속된다. 마티스나 피카소가 포기했던 완전추상을 칸딘스크와 클레가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흐의 편집방법론과 같은 회화 바깥의 창조방법론에 대한 체계적인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음악처럼 자유롭게 조합되는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회화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울러 추상회화적 시도들이 바우하우스 공방을 통해 다양한 생활용품의 생산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 있었기에 바우하우스는 프랑스의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갔던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편집의 차원(level of editing)’이 달랐다는 이야기다.

“음악에 비해 미술이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술을 선택했다”는 클레의 추상회화가 바흐의 음악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에 관해서는 다음호로 이어진다. 이텐보다는 클레가 한 수 위다.

<광주일보와 중앙SUNDAY 제휴 기사 입니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