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의사의 신뢰
2019년 07월 11일(목) 04:50

[기홍석 안과 원장]

1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교복을 입은 생기발랄한 한 여고생이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섰다. 단순한 알레르기 결막염 정도로 판단되어 처방을 하고 진료를 마치려다, 유난히 커진 검은 자위가 마음에 걸려 안압을 측정하게 되었다. 안압이 굉장히 높아 안과 정밀검사를 시행하게 되었고, 검사 결과 상당히 진행된 녹내장으로 판명되었다. 증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녹내장이 흔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시야 결손이 심한 녹내장이라 본인은 물론 의사인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선천성 녹내장에서 볼 수 있는 데스메막 파열 증후 등 통상적인 증상과는 많이 다른 여러 증후 때문에 녹내장 학회에서 증례 토의 주제로 올리기도 하고 여러 문헌을 찾아보는 등 그녀의 녹내장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안압이 잘 조절되었고 건강한 젊은이였던 그녀는 더 이상 증상이 악화되지 않고 시력과 시야가 잘 유지되었다.

15년이 흐른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내 환자이다. 그동안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다니다가, 본인의 녹내장이 계기가 되었는지 직장을 그만두고 간호대학에 진학하여 간호사가 되었다. 같은 의료인이 된 그녀는 병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치료에 열심이었고 결과도 좋았다. 의사와 환자 관계이지만 때론 병의 경과와 치료 내용을 공유하면서 상의하기도 했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첫째 아이 임신 때였다. 임신 시엔 녹내장 치료에 어려움이 있다. 대부분의 녹내장 치료 약제들은 태아에 대한 안전성이 확보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임신 시에는 녹내장 약을 투여하지 않아도 안압이 상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녀는 임신 초기부터 안압이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녹내장 약물을 투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안압이 높아졌다. 임신 기간 중 약제를 사용할 때에는 기형아 발생 확률이 가장 높은 기간을 최대한 피하고, 치료약 중 비교적 위험성이 낮은 약제를 투약하며 안압을 조절해 갔다. 다행히도 녹내장의 큰 악화 없이 분만을 하였고, 그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둘째를 가지겠다고 했다. 첫째 아이 임신 때 고생했던 기억에 슬슬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또 그녀는 첫째의 병치레가 잦은 이유가 녹내장 치료 때문에 모유 수유를 못한 자신의 탓이라 자책을 하면서 둘째는 꼭 모유 수유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내보였다. 숙제를 하나 더 떠안은 셈이었다. 그렇지만 첫째 아이 치료 때의 경험으로 임신 기간 동안 약제와 레이저를 미리 계획하고, 적절히 가감하면서 녹내장 치료를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무사히 둘째를 분만하고 약물을 투여하지 않으면서 모유 수유 중이다. 물론 안압은 다소 높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던 중, 오늘 진료실로 그녀가 감사의 손 편지와 함께 작은 선물을 가져왔다. 산모와 아이가 모두 건강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가슴 뿌듯한 일인데 이런 감사를 받고 보니 오늘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아! 이런 보람에 의사 노릇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간호사로서 치료에 대한 위험과 이득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고, 허심탄회하게 치료의 부작용 등에 대해 서로 고민하고 상의를 할 수 있어 내 나름 소신껏 치료할 수 있었다. 치료에 있어서 환자와 의사의 유대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아이의 건강을 간절히 빌어 본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