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스파게티는 죄가 없어
2019년 04월 19일(금) 00:00 가가
스파게티는 먹는 게 아니었다. 이미 늦었다며 어서 서두르라는 재촉이 마음 한 구석에서 끈질기게 올라오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에게 스파게티는 항상 기대로 시작해서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그만 맛있어 보이는 비주얼에 현혹되어 먹고 가라는 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앉은 자리에서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말았다. 식당에서 파는 스파게티에 실망하는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퍽퍽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맛이 너무 강하다는 것. 그러나 이건 퍽퍽하지도, 맛이 강하지도 않았다. 파, 마늘 같은 강한 양념과 고기를 넣지 않는 절집 음식에 익숙한 내 입맛에 아주 딱이었다. 봉사하러 왔다는 원래 취지는 까맣게 잊고, 다음 일정에 이미 늦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나는 15분 넘게 오로지 스파게티에만 집중했다.
밖으로 나오니 사방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제서야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얼른 시동을 걸고 갈 곳을 네비게이션에 찍었는데…. 웬걸! 검색이 되질 않았다. 급한 마음에 전화번호로도 검색했는데 이번에 주소가 다르게 나왔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찾아줘야 마땅한데 기계 주제에 못하겠다고 지시를 거부하니, 급한 마음에 살짝 짜증이 나려 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알기 때문에 핸드폰에 있는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했다. 다행히 시키는 대로 잘 찾아줬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큰 길을 놔두고 샛길로만 계속 가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따라가긴 가는데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내 속을 알리 없는 주최 측 실무자는 계속 전화를 해왔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네비게이션에게 짜증을 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는 나의 합리적 이성은 당장 화를 퍼부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스파게티에 정신이 팔려서 다음 일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자신은 까맣게 잊은 채, 주최측 실무자를 아무런 상의 없이 무리하게 약속을 잡는 사람으로 매도하고는 그에게 짜증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는 신호등도 없는 작은 삼거리에 정차했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미 약속 시간에 한참을 늦어 버린 상태. 불과 몇 분 사이에 마음 속에서 파란만장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 모든 일들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화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엔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출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아무 것도 없다. 좌절된 욕망에서 화는 자라난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도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한 감정의 떨림이다. 화는 왜곡된 욕망이다. 욕망을 그대로 방치하면 할수록 화는 그만큼 에너지를 더 공급받아 스스로를 키운다. 그렇게 해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격렬해진 상태를 흔히 “화가 단단히 났다.”라고 말한다. 이 정도가 되면 분노는 한 사람의 마음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게 된다.
미미한 감정의 떨림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화의 근본은 좌절된 욕망이지만 화의 출발은 화를 알아차리지 못함이다. 알아차릴 정도의 빈 자리가 마음에 없을 때 화는 시작된다.
불교란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이 순간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이것이 바로 나다. 지금 화가 나 있다면 “무엇이 화를 내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곧 불교이며, 걸을 때 “무엇이 걷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불교다. 마음의 빈자리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나는 무엇인지 질문하는 마음 자세이다. 그리고 수행이란 내 마음 속에 빈 자리를 만들고 시키는 시간이다.
스파게티에 영혼이 탈탈 털린 하루였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 스파게티는 얼마 전 자비신행회 청년 식당에 올라온 저녁 메뉴였다. 혹시라도 자비신행회 청년 식당에 봉사하러 갈 일이 있다면 마음 단단히 먹길 신신당부한다.
모든 화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엔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출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아무 것도 없다. 좌절된 욕망에서 화는 자라난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도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한 감정의 떨림이다. 화는 왜곡된 욕망이다. 욕망을 그대로 방치하면 할수록 화는 그만큼 에너지를 더 공급받아 스스로를 키운다. 그렇게 해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격렬해진 상태를 흔히 “화가 단단히 났다.”라고 말한다. 이 정도가 되면 분노는 한 사람의 마음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게 된다.
미미한 감정의 떨림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화의 근본은 좌절된 욕망이지만 화의 출발은 화를 알아차리지 못함이다. 알아차릴 정도의 빈 자리가 마음에 없을 때 화는 시작된다.
불교란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이 순간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이것이 바로 나다. 지금 화가 나 있다면 “무엇이 화를 내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곧 불교이며, 걸을 때 “무엇이 걷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불교다. 마음의 빈자리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나는 무엇인지 질문하는 마음 자세이다. 그리고 수행이란 내 마음 속에 빈 자리를 만들고 시키는 시간이다.
스파게티에 영혼이 탈탈 털린 하루였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 스파게티는 얼마 전 자비신행회 청년 식당에 올라온 저녁 메뉴였다. 혹시라도 자비신행회 청년 식당에 봉사하러 갈 일이 있다면 마음 단단히 먹길 신신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