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재의 세상만사] 그래도 전라도가 키운 전라도 기업인데…
2019년 04월 12일(금) 00:00
빨간색 줄무늬에 거북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 거북이가 눈에 띄면 반갑기 그지없었다. 신병 훈련소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거북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향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는 이도 있었다. 거북이는 그만큼 우리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존재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선 대낮에도 코를 베어 간다는 말이 있었던 시절. 거북이는 시골 촌놈을 서울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추억의 ‘광주고속’ 버스다. 명절 때도 많은 사람들이 거북이를 이용했다. 그 속에서 숱한 로맨스도 피어났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골인했다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러웠다. 서울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설레었다. 내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가 앉아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보면 헉, 늙은 할머니! 기대는 늘 실망으로 바뀌었다. 머피의 법칙은 어찌 그리 잘도 들어맞던지.

광주고속이 심벌마크로 거북이를 선정해 사용한 것은 고속버스가 막 운행되기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 말경부터다. 느린 거북이를 택한 것은 안전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초 박정구 전 회장(당시엔 전무)은 개(포인터)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미국의 고속버스 업체 그레이하운드를 참조한 것이었다. 한데 이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급히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금호의 마지막 비장한 각오

“어느 잡지사 기자와 얘기를 나누는데 그 사람이 농반진반으로 거북이 얘기를 꺼냈어요. 다들 빠른 동물을 내걸 때인데 제일 느린 동물을 심벌로 한다는 게 기발하기도 하고, 또 안전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즉시 박정구 전무와 박성용 회장께 상의 드렸지요. 모두 대환영이었고 박인천 창업회장 님의 최종 승인 과정에서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박삼구 회장의 회고다.

오늘 거북이에 대한 추억에 젖어 보는 것은 요즘 광주고속을 모태로 한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 때문이다. 그래도 전라도가 키운 우리 전라도 기업인데…. 안타까운 마음에 창업주 박인천 회장의 일대기를 펼쳐 본다. ‘집념-길 위의 길’이란 제목의 소설이다.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만을 허용하고 모든 것은 자료와 증언에 근거한 사실로 구성했다고 한다.

지은이는 뜻밖에도 ‘박하사탕’ ‘밀양’의 영화 감독 이창동이다. 그가 한때 국어교사를 지냈으며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런 그가 기업인의 일대기를 쓰다니, 참 의외다. 정통파 작가들은 보통 기업인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낸 ‘좌파’(?) 문인 아닌가.

이창동은 왜 금호 박인천이란 인물에 끌렸을까. “무엇보다 그의 일생이 만만치 않은 역사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끝없이 도전과 시련을 거치면서 자기 갱신을 거듭하여 오늘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일생은 우리 역사의 엄정한 상징이 되고 있고, 또 그만한 교훈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금호는 일제 강점기에 경찰을 지냈다는 이유로 인민군에 잡혀 형무소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형무소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차후 사업을 구상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형무소 생활을 끝낸 뒤, 다시 돌아온 그의 회사는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이어와 휘발유를 얻기 위해 단독으로 부산행을 감행한 것이다. 여전히 빨치산이 활동하고 있어 위험하던 때였다. 그는 말한다. “남들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 절대 돈 못 번다.”

이창동은 2년에 걸친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박인천의 집념 어린 생애와 기업 정신을 감동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박인천은 190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서당에 잠깐 다니다가 늦은 나이에 나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2학년) 이후 여러 장사에 손을 댔지만 거듭 실패했다. 막연한 꿈을 안고 건너간 일본에서 그는 또다시 좌절하고, 한 달도 견디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온다.

순사 시험에 합격해 한국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그는 5년간 독학한 끝에 보통문관 시험에도 합격한다. 지금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보통문관 시험을 거의 무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사람이 혼자서 해 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다가 일본인 경찰서장과의 마찰로 사임하고, 1946년 마흔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택시 두 대로 운수 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2년 후, 택시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버스업을 시작,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과 끈기를 무기로 오늘날의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기반을 닦아 놓는다.

‘거북이’ 추억의 광주고속

단숨에 읽어내린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광주시 금남로 5가에 있는 광주시민문화관에 들렀다. 금호 박인천 회장이 부인 이순정 여사와 함께 생전에 살던 자택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소나무 밑에 표지석이 하나 눈에 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오백년을 기리며 2008.5.18. 이순정” 나의 눈은 ‘오백년’이란 문구에 강하게 꽂힌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인걸은 간 데 없고’로 시작하는 시조도 떠오른다. 과연 금호는 다시 일어서서 ‘500년 기업’이 될 수 있을까.

박정구 전 회장이 별세한 이후 어느 인사(박석무 전 국회의원)가 썼던 추모사 한 대목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너무도 힘이 약하고 경제력이 떨어져 있는 전라도. 그나마 금호 그룹이라도 하나 있어 전라도의 긍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렇다. 금호는 우리의 자존심이자 긍지였다. 서울에 가면 우리나라 30대 기업 본사 가운데, 그래도 전라도 사투리가 들리는 곳은 거기 한 군데뿐이지 않았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동안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부질없는 일. 그러니 우선은 어떻게든 금호가 다시 회생할 수 있기를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금호가 오너 일가의 금호고속 지분 전량을 채권단에 담보로 맡기고 5000억 원의 유동성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후 3년 내 정상화에 실패할 경우 아시아나항공도 매각할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다. 이제 주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이 화답할 차례다. 쉽지는 않겠지만, 전라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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