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③ 故 안병하 치안감
2018년 05월 09일(수) 00:00 가가
신군부 발포명령 거부 … 광주시민 목숨과 경찰 명예 지켰다


지난해 12월20일 전남지방경찰청을 방문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안병하 치안감의 흉상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안병하 치안감의 흉상은 옛 전남도청이 복원되면 전라남도경찰국 건물로 옮겨질 예정이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아버님에 대한 명예회복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봅니다. 이제는 아버님과 같이 5·18로 인해 고초를 겪은 경찰분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6일 만난 고(故) 안병하(1928∼1988·5·18 당시 경무관·사진) 치안감의 셋째 아들 호재(59)씨는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5·18 이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을 당한 경찰들의 명예회복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아버지는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내시는 등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신 때문에 고초를 당한 부하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며 “아버지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진 만큼 5·18로 인해 강제해직 당한 분들도 발굴해 선양사업을 펼쳐야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광주·전남을 방문한 이철성 경찰청장은 “안병하 치안감 같이 5·18 때 시민들을 위해 희생한 경찰들을 찾아 위민(爲民) 정신을 기리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항쟁 기간에는 광주시민을, 항쟁 이후에는 부하들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했던 안 치안감의 정신은 38년이 지난 현재에도 새롭다.
◇37년 만에 1계급 특진…뒤늦은 명예회복=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제37주년 5·18기념식에 참석해 5·18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당시 전라남도경찰국장을 지냈던 안병하 치안감도 새롭게 조명됐다. 지난해 6월15일 청와대는 국가유공자 가족 초청 행사에 안 치안감의 아내 전임순(84) 여사를 공식 초청했다.
경찰청은 안 치안감을 ‘2017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며 11월16일자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정부 공식 경찰영웅 칭호는 받은 것은 안 치안감이 처음이었다.
같은 달 22일에는 전남경찰청에서 흉상제막식도 열렸다. 안 치안감의 흉상은 옛 전남도청이 복원되면 전라남도경찰국 건물로 옮겨질 예정이다.
치안감 추서식이 열린 지난 3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은 SNS ‘페이스북’에서 “안병하 치안감은 5·18민주항쟁 당시 전남 경찰국장으로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시민의 목숨을 지키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습니다”라며 고인을 기렸다.
문 대통령은 “그 어느 순간에도 국민의 안전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시민들을 적으로 돌린 잔혹한 시절이었지만 안병하 치안감으로 인해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않을 수 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치안감 추서가 이뤄져 기쁩니다”며 축하했다.
38년 간 힘들게 살았던 전임순 여사 등 유족들은 안 치안감의 명예회복이 뒤늦게나마 이뤄졌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시민 생명 살린 발포명령 거부…‘도망자’ 폄훼도=안 치안감이 5·18 때 했던 대표적인 의로운 행동은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항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80년 5월25일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8년 뒤에 그 후유증 등으로 숨을 거뒀다. 안 치안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당시 도경국장이 근무지를 이탈하고 직무를 유기해 항쟁이 격화됐다”고 폄훼까지 당했다.
호재씨는 “한때 신군부에서 아버지를 ‘도망자’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며 “내가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진짜로 시민들과 경찰을 위해서 힘든 길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난 안 치안감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동기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중위 시절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전투에서 활약해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등 용맹을 떨쳤다. 1962년 중령이었던 안 치안감은 경찰 총경으로 특채됐다. 부산 중부경찰서장, 치안국 작전계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등을 거쳐 1979년 2월20일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안 치안감은 청렴하고 인기 좋은 간부였다. 출퇴근은 걸어서 했고 퇴근 후에는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경들의 막사를 갑자기 방문해 간식거리를 사주기도 했다.
1980년 4월 광주지역 대학가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기동대원들에게 “공격적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학생들에게 돌을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등의 특별지시를 했다. 같은해 5월6일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8일부터 14일까지 ‘민족민주화 성회’를 개최한다고 하자 “학생들이 과격시위를 자제하면 경찰은 시위를 보장하고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다”고 비밀리에 협상한다.
5·18이 일어나자 안 치안감은 무기부터 숨기라고 명령했다. 도청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25일 오후 안 치안감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이희성 계엄사령관, 소준열 전교사사령관가 모인 자리에 참석한다. 안 치안감은 시민 안전을 이유로 경찰의 무장을 거부했다. 이날 안 치안감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갔고 다음날 직위해제를 당했다. 같은해 6월 2일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호재씨는 “무기 수거는 경찰이 시민을 쏘는 참상뿐 아니라 만행을 목격한 혈기왕성한 전경들이 계엄군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였다”며 “발포명령 거부는 육사 동기였던 윤흥정 전교사사령관과 무언의 약속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호재씨에 따르면 광주시민들도 경찰에 대한 고마움을 알았다. 5월21일 이후 시민군이 전남도청 등을 장악했을 당시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초를 섰고 안 치안감의 집무실도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남은 가족의 고통…2중보상 문제=8일간 보안사에 의해 불법감금을 당했던 안 치안감은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당했던 고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1988년 10월10일 안 치안감이 60세에 사망하자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모아둔 재산 퇴직금 등은 8년의 투병으로 모두 소진했다.
유족은 1997년 ‘5ㆍ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에 의해 불법구금 보상금 832만원을 포함한 총 1억1000만원을 지급받았다. 지난 2006년에는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해 순직군경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2010년 9월부터 매달 전씨에게 보훈급여금(130여만원)이 지급됐다.
하지만 감사원은 전임순씨가 받은 5·18보상금과 보훈급여금이 이중보상이라고 지적했고 2010년 12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는 보상금 환수 통지 처분을 내렸다.
유족은 반발했다. 5·18로 인한 피해 보상과 순직에 대한 보상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유족은 미망인만 유족연금 혜택을 받고 있으니 세 아들에 대한 보상금 반환을 면제해 달라는 취지의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지난달 26일 광주시는 보상금 반환 독촉장을 보내기도 했다.
유족은 현재 안 치안감이 받지 못한 8년간의 월급과 사망 이후 유족들이 받아야할 연금을 지급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한 상태다.
호재씨는 “5·18 보상금이 책정될 당시 아버지의 고문에 의한 피해는 1일 8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며 “바른 일을 하다 숨진 공직자 유족들은 왜 불이익을 당해야만 하는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지난달 26일 만난 고(故) 안병하(1928∼1988·5·18 당시 경무관·사진) 치안감의 셋째 아들 호재(59)씨는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5·18 이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을 당한 경찰들의 명예회복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지난 3월 광주·전남을 방문한 이철성 경찰청장은 “안병하 치안감 같이 5·18 때 시민들을 위해 희생한 경찰들을 찾아 위민(爲民) 정신을 기리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전라남도경찰국장을 지냈던 안병하 치안감도 새롭게 조명됐다. 지난해 6월15일 청와대는 국가유공자 가족 초청 행사에 안 치안감의 아내 전임순(84) 여사를 공식 초청했다.
경찰청은 안 치안감을 ‘2017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며 11월16일자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정부 공식 경찰영웅 칭호는 받은 것은 안 치안감이 처음이었다.
같은 달 22일에는 전남경찰청에서 흉상제막식도 열렸다. 안 치안감의 흉상은 옛 전남도청이 복원되면 전라남도경찰국 건물로 옮겨질 예정이다.
치안감 추서식이 열린 지난 3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은 SNS ‘페이스북’에서 “안병하 치안감은 5·18민주항쟁 당시 전남 경찰국장으로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시민의 목숨을 지키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습니다”라며 고인을 기렸다.
문 대통령은 “그 어느 순간에도 국민의 안전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시민들을 적으로 돌린 잔혹한 시절이었지만 안병하 치안감으로 인해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않을 수 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치안감 추서가 이뤄져 기쁩니다”며 축하했다.
38년 간 힘들게 살았던 전임순 여사 등 유족들은 안 치안감의 명예회복이 뒤늦게나마 이뤄졌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시민 생명 살린 발포명령 거부…‘도망자’ 폄훼도=안 치안감이 5·18 때 했던 대표적인 의로운 행동은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항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80년 5월25일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8년 뒤에 그 후유증 등으로 숨을 거뒀다. 안 치안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당시 도경국장이 근무지를 이탈하고 직무를 유기해 항쟁이 격화됐다”고 폄훼까지 당했다.
호재씨는 “한때 신군부에서 아버지를 ‘도망자’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며 “내가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진짜로 시민들과 경찰을 위해서 힘든 길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난 안 치안감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동기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중위 시절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전투에서 활약해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등 용맹을 떨쳤다. 1962년 중령이었던 안 치안감은 경찰 총경으로 특채됐다. 부산 중부경찰서장, 치안국 작전계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등을 거쳐 1979년 2월20일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안 치안감은 청렴하고 인기 좋은 간부였다. 출퇴근은 걸어서 했고 퇴근 후에는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경들의 막사를 갑자기 방문해 간식거리를 사주기도 했다.
1980년 4월 광주지역 대학가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기동대원들에게 “공격적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학생들에게 돌을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등의 특별지시를 했다. 같은해 5월6일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8일부터 14일까지 ‘민족민주화 성회’를 개최한다고 하자 “학생들이 과격시위를 자제하면 경찰은 시위를 보장하고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다”고 비밀리에 협상한다.
5·18이 일어나자 안 치안감은 무기부터 숨기라고 명령했다. 도청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25일 오후 안 치안감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이희성 계엄사령관, 소준열 전교사사령관가 모인 자리에 참석한다. 안 치안감은 시민 안전을 이유로 경찰의 무장을 거부했다. 이날 안 치안감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갔고 다음날 직위해제를 당했다. 같은해 6월 2일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호재씨는 “무기 수거는 경찰이 시민을 쏘는 참상뿐 아니라 만행을 목격한 혈기왕성한 전경들이 계엄군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였다”며 “발포명령 거부는 육사 동기였던 윤흥정 전교사사령관과 무언의 약속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호재씨에 따르면 광주시민들도 경찰에 대한 고마움을 알았다. 5월21일 이후 시민군이 전남도청 등을 장악했을 당시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초를 섰고 안 치안감의 집무실도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남은 가족의 고통…2중보상 문제=8일간 보안사에 의해 불법감금을 당했던 안 치안감은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당했던 고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1988년 10월10일 안 치안감이 60세에 사망하자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모아둔 재산 퇴직금 등은 8년의 투병으로 모두 소진했다.
유족은 1997년 ‘5ㆍ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에 의해 불법구금 보상금 832만원을 포함한 총 1억1000만원을 지급받았다. 지난 2006년에는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해 순직군경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2010년 9월부터 매달 전씨에게 보훈급여금(130여만원)이 지급됐다.
하지만 감사원은 전임순씨가 받은 5·18보상금과 보훈급여금이 이중보상이라고 지적했고 2010년 12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는 보상금 환수 통지 처분을 내렸다.
유족은 반발했다. 5·18로 인한 피해 보상과 순직에 대한 보상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유족은 미망인만 유족연금 혜택을 받고 있으니 세 아들에 대한 보상금 반환을 면제해 달라는 취지의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지난달 26일 광주시는 보상금 반환 독촉장을 보내기도 했다.
유족은 현재 안 치안감이 받지 못한 8년간의 월급과 사망 이후 유족들이 받아야할 연금을 지급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한 상태다.
호재씨는 “5·18 보상금이 책정될 당시 아버지의 고문에 의한 피해는 1일 8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며 “바른 일을 하다 숨진 공직자 유족들은 왜 불이익을 당해야만 하는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