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호남지]곤재 정개청과 자산서원 - 김형주
2017년 08월 01일(화) 00:00
전라도 들여다보기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은 1529년 나주에서 부친 정세웅과 모친 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보성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년에 걸쳐 성리학과 천문·지리·의약·주역 등의 잡학을 탐구하였다. 성년이 되어서는 개성의 서경덕 문하에서 수학한 후 박순(朴淳)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해 윤암(輪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이름을 날렸다.

1574년 전라감사 박민헌과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례의 관직 진출 권유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그의 관직생활은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북부참봉을 시작으로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데 머물렀다.

1589년에 기축옥사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목의 누명을 쓰고 1590년 5월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渭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6월에 함경도 경원으로 옮겨졌고, 7월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곤재의 가문과 관직생활은 평범하여 두드러진 업적은 크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그가 역사적인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참화를 입은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 그의 학덕을 기리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설치와 철거 과정을 반복하였는데, 조선사회에서 유림들에 의해 서원의 존립과 당쟁을 연계하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산서원은 남인이 집권하면 건립 복설되고, 서인이 집권하면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다수의 호남지방의 사림들이 이 분쟁에 관련됨으로써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쟁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의 저명한 제자들로는 나덕준(羅德峻)·나덕윤·나덕현·나덕원 4형제를 비롯해 안중묵·최홍우·정지함 등 당시 호남지방의 유력한 가문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주목된다.

함평 엄다면 제동마을에 소재하는 자산서원은 조선중기 호남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을 배향하고 있다. 1678년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이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나 훼철되는 유례없는 수난을 겪었다. 이 곳은 중앙정치에 크게 휘둘려왔던 조선시대 호남사림의 성장과 억압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자산서원은 지난 1957년에 복설되었으며 1988년 대규모의 복원 정화작업을 실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 소장되어 있는 선생의 문집 ‘곤재 우득록(愚得綠) 목판’은 1987년 전남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우득록’은 호남사림의 인맥과 동향 등을 담고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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