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② 바다와 결혼해 富를 이룬 베네치아
십자군 전리품 나눠 갖고 해양제국으로 거듭났다
2017년 05월 04일(목) 00:00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500년 동안 풍요를 누렸던 베네치아 전경.

수로 양변의 풍광에 흠뻑 빠져 있는데 이번에는 광고 간판이 붙은 큰 대리석다리가 나타난다.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최초로 건설한 리알토 다리이다. 길이는 48m 정도. 1591년에 건축가 안토니오 다 폰테가 설계 감독한 다리인데 미켈란젤로가 설계단계에서 응모했을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이 컸던 숙원사업이었다고 한다.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산마르코대성당까지 걸어서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고 하니 베네치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이 간다.

리알토 다리 밑을 통과하자마자 고딕양식 건축물인 카 포스카리 교회,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피카소와 몬드리안 그림을 소장한 구겐하임 미술관 등이 가깝게 보인다. 카메라 렌즈가 어디를 향하더라도 다 근사한 구도이다.

어느 새 목적지 부근에 온 것 같다. 산마르코대성당 앞에 있는 100m 높이의 종탑이 보인다. 선창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곤돌라 선착장 옆으로 수상택시가 멈춘다. 나룻배인 곤돌라는 어원이 ‘흔들리다’ 혹은 ‘작은 케이블카’라는 뜻이란다. 선수와 선미가 버선코처럼 올라가서인지 모양이 날렵하다.

산마르코대성당을 가기 전에 성인 마르코가 누구인지 사전지식이 필요할 듯싶다. 베니스의 수호성인이자 마르코(마가)복음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다. 산마르코대성당이 순례지가 된 것은 마르코 유골을 안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있던 마르코의 유골이 베네치아로 온 사연은 드라마틱하다.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가 마르코를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보냈고, 마르코는 거기서 교회를 세운 뒤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코는 바오로(바울)의 1차 선교 여행 때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를 거쳐 키프로스 섬까지 바오로와 동행했다고 하니 그의 선교의지는 강고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르코는 부활절미사 도중 이슬람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혔고, 이슬람교도들은 그의 목에 밧줄을 걸어서 짐승처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이튿날에도 악행을 되풀이했던 바, 마르코 주교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를 낭자하게 흘린 채 순교하고 만다. 이에 이슬람교도들이 장작을 쌓아두고 시신을 불태우려 했는데 갑자기 하늘이 노했다. 검은 구름장이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쳐대자 이슬람교도들은 시신을 놓아두고 도망쳤는데, 그때 마르코 주교의 신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있던 유골은 829년 두 명의 베네치아 상인이 수완을 발휘하여 베네치아까지 옮겼고, 이를 기념하여 마르코 성인의 이름으로 성당을 짓고 성스러운 유해를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는 사연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작았던 산마르코성당이 규모가 커진 이유는 십자군의 동방원정과 베네치아 사람들의 상인기질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골수까지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들이었다. 로마 교황의 눈치를 보아가며 적국인 이슬람제국과 무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사계약은 법처럼 신성시했다. 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중세역사상 최대의 계약을 눈앞에 두고 베네치아 도제(Doge 도시국가 수장) 단돌로와 십자군을 모병한 프랑스 사절들 간에 밀고 당기기를 했다. 베네치아가 말과 기사와 보병을 실어 나를 선박과, 군사와 말의 9개월분의 식량과 말먹이 등을 책임지는 대신 십자군은 9만 4천 마르크를 지불해야 하고 함대가 출항하는 날로부터 1년간 정복하는 땅의 이익 절반을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던 것이다. 단돌로는 최후 단계로 산마르코 성당에 모인 1만 명의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추인을 받았다. 베네치아로서는 위험이 따랐지만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거래였다. 큰 도박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사람들은 단돌로를 믿고 통상금지령을 지켰다. 아무도 장사하러 지중해로 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4차 십자군의 동방원정용 선박건조와 보급품과 식량 조달하는 일에 2년 동안 매달렸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1차 십자군 이후 1123년에 또 참여하여 큰 이득을 보았던 바, 1122년에는 티레 시(현 레바논 도시)의 땅 3분의 1을 얻었고 면세무역의 조건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는 베네치아가 해양제국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었다. 아무튼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서부 그리스 전 지역과 코르푸, 이오니아 해의 섬들, 에게 해의 크레타 섬,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땅 8분의 3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산마르코성당은 대성당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동방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단돌로 도제는 산마르코대성당을 꾸밀 수 있도록 동방에서 돌아오는 상인들에게 골동품, 대리석, 조각품 등을 가져와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만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선착장에 내린 일행은 산마르코대성당으로 향한다. 선착장 옆에 있는 두 개의 석주 역시 전리품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거친 말로 하자면 약탈이다. 마침 성당 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내부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성당 정면에는 다섯 개의 아치형 출입문이 있고, 그 위에는 모자이크 벽화들이 있다. 벽화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마르코의 유골을 베네치아 상인이 빼돌리는 모습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로 감싼 마르코의 유골을 보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인데 베네치아 상인의 기지가 놀랍기만 하다. 돼지고기는 이슬람교도들이 터부시하는 고기인 것이다. 또한 벽화들 위쪽 중앙에는 네 마리의 청동마상이 있다. 진품은 성당 안에 있다는데 그것 역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가져온 전리품이다. 청동마상 위에는 날개 달린 황금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마르코 성인을 상징하는 황금사자상이다. 바다와 결혼했다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배 돛대에 황금사자상 깃발을 올려놓고 무사항해를 기원했다고 하니 황금사자상은 마르코 성인과 다를 바 없다. 베니스영화제의 최고상이 왜 황금사자상인지 아하! 하고 무릎이 쳐진다. 더구나 나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학력지상주의 벽을 무너뜨려버린 김기덕 감독이 영화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산마르코광장은 제법 크다. 광장을 ㄷ자로 에워싼 나폴레오니카 궁(오른쪽)과 프로쿠라토레 궁(왼쪽)의 회랑을 타고 명품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무라노 섬의 특산품인 유리공예품과 가죽으로 만든 수제품, 축제 때 쓰는 가면 등에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인다. 궁 바깥쪽에도 수공업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기 위해 다시 돌아 나와서 프로쿠라토레 궁의 한 카페를 찾는다. 1683년에 개업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3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플로리안 카페이다. 첫 이름은 ‘베네치아의 승리’였지만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뒤 플로리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루소, 스탕달, 바이런, 셸리, 조르주 상드, 샤토 브리앙, 디킨스, 모네, 마네, 하이네, 괴테, 바그너, 니체, 릴케 등이 베네치아에 머물며 플로리안 카페를 자주 찾았단다. 오늘은 한국문단 말석의 한 작가가 바그너가 만든 불교가극 ‘승리자’를 떠올리며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놓고 그 향기를 맡고 있다. 바그너의 ‘승리자’는 ‘자기를 극복한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부처의 가르침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요양하던 중에 생을 마감한 바그너에게도 에스프레소 한 잔을 권하고 싶다.

/베네치아=글·사진 정찬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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