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포츠/연예
오피니언
weekend
사설
칼럼
이홍재칼럼
기자노트

[이홍재의 세상만사] 배터리도 5%면 갈아 끼운다

2016. 11.11. 00:00:00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보다 더 심한 ‘순실증’을 보이며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는 이때 금남로에 울려 퍼지는 노래 하나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찬찬히 들어 보니 ‘아리랑 목동’의 노랫말을 바꾼 일종의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다.
“하야∼ 하야∼ 하야 하야 하야야∼/ 꼭두각시 노릇하며/ 나라 망친 박그네야/ 아버질랑 최태민이/ 제아무리 좋아도/ 동네방네 나라 꼴을/ 굿판 치면 되오리까.” 2절도 있다. “꼭두각시 앞세우고/ 뒷돈 캐는 순실이야/ 말 못 타는 딸자식이/ 제 아무리 답답해도/ 동네방네 그네 팔아/ 삥 뜯으면 되오리까.”
수년 전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였던가. 성명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이름 풀이를 해댔는데 박 대통령은 말년 운이 안 좋다고 했다. 주역에 나오는 ‘택수곤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택수곤괘(澤水困卦)는 ‘연못(澤)이 위에 있고 물(水)이 아래에 있으니 물을 댈 수가 없어 크게 낭패를 보는 상황’을 말한다. 이런 점괘가 맞은 것일까? 지금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요구하고 있다.
‘미르 재단’이 처음 불거지기 시작할 때 나는 직감적으로 이게 대통령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용포’(龍袍:임금이 입던 옷) 또는 ‘용안’(龍顔:임금의 얼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용은 과거 왕조시대 임금의 상징 아니었던가.(일부 정치평론가들이 사이비 교주였던 최태민을 의식해서 ‘미르’를 ‘미륵’과 관련시키기도 하지만 이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우리 선인들은 은하수를 ‘미리내’(미르+내)라 했다. 용이 살고 있는 강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우윳빛을 띤다 해서 ‘밀키웨이’(Milky Way)라 부르는 서양에 비해 ‘미리내’는 얼마나 상상력이 빛나는 단어인가.
최순실의 죄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나는 ‘우리말을 더럽힌 죄’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미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오염시킨 죄다. 과거에도 그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은 우리 사회의 정의를 짓밟아 놓고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정의’라는 단어를 더럽혔다. 최태민·박근혜의 구국봉사단 또한 마찬가지다. 위태로운 나라를 구한다는 ‘구국’(救國)이라는 말은 그들이 사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구국’은 한낱 천박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요즘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최순실 얘기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면서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가운데 최순실의 최측근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들은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의 예산 확보를 위해 아시아문화전당 사업을 그대로 베꼈고, 이 때문에 문화전당 예산도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화전당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문화창조융합벨트사업의 내년 예산 1278억 원을 전액 문화전당 사업으로 돌려야 한다는 민주당 박혜자 전 의원의 주장은 백번 맞는 말이다.
‘일도 이부 삼빽’이란 말이 있다. “들통이 나면 우선 도망치고, 잡히면 부인하고, 그래도 안 되면 ‘빽’을 동원하라.”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최순실과 차은택은 이런 범죄자들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따르며 온갖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죄상이 하나하나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는데 연설문을 고친 ‘빨간 펜’정도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들의 마수(魔手)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평창올림픽마저 그들의 축재(蓄財) 수단이 됐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이고 말았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 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대통령의 이 말은 지금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탄 뒤 국제대회 성적이 확 떨어졌다는 명마(名馬)가 말한다. “이러려고 정유라 태워 줬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소설가 김영하(48)는 이렇게 썼다. “쏟아지는 뉴스보다 재미없는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자니, 내가 이러려고 소설가 되었나 자괴감 들고 괴로운 나날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칼럼을 쓴답시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도 이러려고 기자가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패러디는 이게 아닐까 싶다. “내가 이러려고 투표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박근혜·이정현을 찍었던 사람들까지도 요즘엔 손목을 자르고 싶다 하는 판이니.
박근혜 대통령은 일찍이 부모를 총탄에 보낸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최순실 사태로 우리 모두는 그녀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됐다. 우리들의 참담하고 허탈한 심경을 그 뉘 있어 달래 줄 것인가.
‘멘붕’ 상태에 빠진 우리를 그나마 위무해 주는 것은 몇몇 패러디와 신랄한 풍자뿐이다. “옛날 헬-조선에 닭씨 성을 가진 공주가 살았는데 닭과 비슷한 지력을 가졌다”로 시작되는, 연세대생이 썼다는 고대소설 형식의 ‘공주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사기꾼 기질과 영험함으로! 국정을 농단하여 조선을 복속시키고! 그 나라의 이름을 헬조선으로 개명하고! 순실여왕이 되었구나∼(얼쑤)” 어느 소리꾼이 지었다는 창작 시사 판소리 ‘순실가’.
동영상을 통해 판소리 ‘순실가’를 들으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참에 ‘카톡’에 이런 메시지가 날아온다. ‘최순실은 위대한 여인이었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녀가 왜 위대한 여인인가? “일거에 국민통합을 이루고, 국민으로 하여금 박정희 망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청와대 민정수석과 문고리 삼인방도 단숨에 제거하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민 앞에 머리 숙이게 하고….”
하지만 박 대통령은 끝까지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하다. 여야 합의로 총리를 뽑아 달라고 했지만 2선 후퇴라는 말은 끝내 꺼내지 않아 시간 벌기용 꼼수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어쨌거나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한없이 떨어지더니 한 자릿수인 5%까지 추락했다. 누가 말했던가. “배터리(축전지)도 5%면 갈아 끼워야 한다”고.
〈주필〉

기사 목록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