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나춘자씨] 애면글면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갔다
2016년 04월 21일(목) 00:00
인생에서 뭔가 이루려고 애면글면할수록 엉뚱한 길로 들어설 때가 있다. 하지만 흘러가는 것들에 그저 삶을 맡겨도 우려할 만한 곁길로 가지는 않는다. 그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면에 있기 때문. 그래서 돌아보면 그럭저럭 살아왔다고 스스로 위안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선생의 아내가 꿈이었던 여자. 스물 네 살의 춘자는 결혼 적령기였다. 목포에서 간호보조원 교육을 마치고 양호교사를 준비하던 차였다. 한창 독일 열풍이 불던 70년대 초반이었다. 돈도 벌고 시야도 넓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1972년 친구와 함께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님은 결혼할 나이기 때문에 3년 후에 돌아오면 시집보내리라 다짐했다.



춘자는 여고 때 내장사에 놀러갔다가 만난 남자와 독일 와서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9년을 사귀었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남자의 말에 꿈이 달아났다. 농사꾼의 아내가 되는 것은 정말 싫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고생이란 걸 일찍 알았기 때문이다. 독일이라는 먼 거리도 장애였다. 결국 이별을 통보하고 병원도 옮겼다. 이후 편지도 사랑도 끝이 났다.

남자 내과병동에서 일할 때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독일 할아버지들이 대부분 팬티를 입지 않고 있어서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환자들에게 친절했더니 퇴원한 후 프로포즈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젊은 남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내 의견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난 결혼 승낙의 권리가 부모님께 있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 남자가 사전을 달라고 하더니 ‘리베(사랑)’를 찾아서는 ‘이것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하하.”

결국 춘자는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만 해야 한다고 했더니, 독일 사람은 쿨하게 갔다. 한 번만 더 대시해줬다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하고 춘자는 웃었다.

또 언젠가 혼자서 약을 못 먹는 환자에게 약을 먹여줄 때의 일이다. “이상하게 약이 너무 커서 안 들어가는 거에요.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근데 글쎄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엉덩이에 넣는 좌약이었어요. 결국에 입으로 넣긴 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환자한테 미안해요.”

신안군 지도에서 태어난 나춘자(67세)는 7남매 중 5째였다. 섬이지만 농사를 지어서인지 돈은 없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다. 하지만 농사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융자를 내어 빚이 있었다. 목돈이 필요했다. 춘자가 보내준 돈은 요긴하게 사용했다. 아버지는 독일에서 보내준 돈을 찾기 위해 목포로 가는 배를 타곤 했다. 은행에서 돈을 찾고는 가슴을 조이며 돈 뭉치를 안고 섬으로 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졸음이 쏟아져도 잠을 못 잤다.

춘자는 첫 월급을 900마르크를 받아 용돈 조금 남겨두고 모두 한국으로 보냈다. 딸이 돈을 송금할 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은 부풀었고, 집안경제는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입이 마르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딸 자랑을 했다.

춘자는 독일 온 후 3년이 지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가서 살아볼 생각도 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인사하라고 마당 한 귀퉁이 방으로 데리고 가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고 아버지가 입던 두루마기가 걸려져 있더라고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죠.”

아버지는 춘자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복막염이 걸렸지만, 시골에 의사가 없어 광주로 이송 중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딸을 앞에 놓고 울었다. 아버지는 독일로 보내는 편지에는 기분 좋은 이야기만 쓰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어느 때엔가는 딸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토해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죽음을 딸이 1년 후에나 알게 되다니, 춘자는 어이없어 더 크게 울었다.

“아버지가 외국 가면 몸조심하고 사람 조심하라고 했어요. 독일 놈들은 다섯 명이 있어야 겨우 성냥개비를 켜는 지독한 독종들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 유언일 줄이야.”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춘자의 마음은 고향에 대한 생각이 싸늘해졌다. 결정적으로 독일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한 것은 소매치기 사건이었다.

“광주 버스 터미널에서 언니가 화장실 다녀온 사이 조카를 잠깐 돌보는데 옆에 놔둔 가방을 누가 훔쳐 갔어요. 누군가 돈 냄새를 맡았나 봐요. 한국에서 쓰려고 안 먹고 안 마시고 독일에서 모은 돈인데….”

가방 속에는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 뭉치가 들어 있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길로 경찰서로 달려갔지만 이미 사라진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몇 년간 고생했던 독일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피와 땀이 서린 돈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춘자는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춘자는 독일에 온 지 10년이 된 1982년에 결혼했다. 춘자가 다니는 교회에 한인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녀의 오빠가 영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오빠가 여름방학에 독일에 놀러왔다가 서로 호감을 느끼던 차, 당시 서울대 이윤상 교수가 다리를 놨다. 남편이 영국에 사는 동안 편지와 전화로 사귀었고, 1년 만에 결혼했다. 남편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목회를 시작했고, 1987년 베를린 늘푸른 교회를 창립했다. 춘자는 선생의 사모는 아니지만 사모님이 되었다. 춘자는 가난한 목회자 남편을 위해 간호사로 돈을 벌어 뒷받침했다.

하지만 5년 동안 목회에 온 몸을 던진 남편에게 질병이 찾아왔다. 춘자의 남편은 공부도 하고 잠시 목회를 쉬겠다고 캐나다 유학행을 제안했다. 춘자는 남편의 뜻을 따랐고, 제2의 삶이 시작되었다. 춘자 인생에 캐나다에서의 짧은 삶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남편의 몸은 자꾸만 쇠약해져갔다. 병원 검사 결과 간암 말기였다. 다시 독일에 와서 수술했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1995년 4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춘자 나이 47세로, 당시 10살, 8살 두 아이가 있었다. 춘자는 다시 간호복을 입었다.

“그 당시에는 과부라는 게 정말 창피했어요. 서류 쓸 때도 과부라고 쓰는 게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죠.”

가끔 혼자 된 이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춘자는 일찍 그 일을 겪었기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얼마나 슬프고 아픈지 안다. 그래서 춘자의 소망은 단 하나다.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해 같이 슬퍼해주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 부르시는 그때까지 겸손하게 남을 도와주고 싶어요. 지나고 보니 그분(하나님)이 내 삶을 만지고 인도해주신 것을 알아요. 힘든 과거였지만 그래도 은총 가운데 잘 살아왔네요.”

어느새 춘자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