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의 기적
2021년 01월 15일(금) 05:00 가가
1347년 백년전쟁 때의 일이다. 영국의 집중 공격을 받은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는 1년이 넘는 끈질긴 저항 끝에 결국 항복했다. 영국 왕은 처음 모든 칼레 시민을 죽이려 했다가 취소하고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건다. “시민 대표로 여섯 명을 뽑아 와라. 그러면 그들만 처형하고 나머지 시민은 살려 주겠다.”
칼레 시민들이 고민에 빠졌을 때 놀랍게도 부유층과 고위 관료 등 여섯 명이 자신의 목에 밧줄을 맨 채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기적 같은 사건인데, 로댕의 조각 작품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르며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칼레의 기적’은 2000년 축구 경기장에서 또 일어났다. 칼레를 연고로 한 프랑스 축구 4부 리그 팀 ‘라싱 유니온 FC 칼레’(부두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동호인 클럽)가 FA컵에서 1부 리그 팀들을 물리치고 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비록 오심으로 인해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지만 프랑스 축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다.
지난 11일 영국 머지사이드주의 마린FC 팀에도 작은 기적이 찾아왔다. 126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조기축구 수준인 8부 리그 팀이 FA컵 3라운드에서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팀인 토트넘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마린은 이 한 경기로 많은 것을 얻었다. 팬들의 사랑과 자부심이다. 코로나로 인해 무관중 경기로 열리자 구단은 1장 당 15000원 하는 ‘가상 티켓’을 판매했다. 관중석은 고작 300여 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기장 한 쪽에 이름만 적어 놓게 되는 티켓이 인구 5만 명 도시에서 무려 3만 697장이나 팔렸다. 마린 구단은 중계권료 등을 포함해 5억여 원을 벌어들여, 향후 20년간의 팀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비록 경기는 토트넘의 5-0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양 팀 선수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박수를 받았다. 축구가 왜 위대한 스포츠인지를 보여 주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준, 마치 축제 같은 경기였다.
/유제관 편집1부장 jkyou@kwangju.co.kr
비록 경기는 토트넘의 5-0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양 팀 선수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박수를 받았다. 축구가 왜 위대한 스포츠인지를 보여 주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준, 마치 축제 같은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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