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실종
2020년 04월 02일(목) 00:00
1986년 11월 18일 우리나라 한 유력 신문은 ‘김일성 피격 사망’ 소식을 1면에 전했다. 떠도는 소문을 검증 없이 쓴 것이다. 하루 뒤인 19일자의 1면 제목은 ‘김일성은 살아 있었다’였다. 비교적 최근인 2003년 4월 4일 오전에는 주요 방송사들이 ‘마이크로소프트 빌게이츠 회장 피살’이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CNN을 가장한 허위 사이트의 정보를 그대로 인용한 오보였다.

언론사는 헤아릴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검증해 팩트(fact)를 전달하는 기관이다.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것은 언론기관의 의무이며 이 과정을 흔히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라고 한다. 현장 기자·부장·편집국장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내용이 바뀌기거나 삭제되기도 하지만, 그 기준은 역시 팩트 여부다.

개개인이 발산하는 온갖 정보가 온라인과 SNS를 뒤덮으면서 이제는 가짜와 진짜를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들이 쏟아 내는 거짓에 우리나라 영향력 1위의 언론인마저 속았을 정도이니 아찔하다. 팩트 검증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굴복할 만큼 거짓이 유려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 검증 시스템을 갖춘 언론사들이 실수나 검증 오류 등으로 오보를 내는 반면, 사이버 세계에서는 ‘의도’를 갖고 거짓을 양산한다는 차이가 있다. 익명 보장과 추적 불가능 시스템을 자신의 목적 달성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럼에도 포털사이트나 SNS 운영 주체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거짓들을 차단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클릭이 곧 수익으로 이어지는 시스템 때문이다.

최근 10~20대가 주도한 ‘n번방’ 사건을 보면서 그들을 괴물로 키워 낸 온라인의 익명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거짓과 가짜의 유통을 용인·방조하는 포털사이트나 SNS에 대해 보다 철저한 규제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온라인에서 신분 위장을 통해 상대방을 속이고, 남에게 욕설을 던지며,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행위가 이처럼 쉽게 이뤄지는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듯하니 말이다.

/윤현석 정치부 부장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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