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탄생 100주년] <6> 후쿠오카 형무소
광복 6개월 앞두고 스물여덟에 형장의 이슬 되다
2017년 07월 10일(월) 00:00

구치소로 바뀐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설치된 철조망. 〈시산맥 제공〉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 주지 않겠어?’라는 급우들의 청을 받고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위의 글은 2006년 ‘현대문학’ 6월호에 실린 윤동주 연구가 야나기하라 야스코의 특별기고 일부다. 당시 윤동주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기에 앞서 도시샤대학 친구들과 송별회를 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공부하며 정이 들었던 친구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가 ‘아리랑’이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별회에 참석해준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과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잃지 않았다는 의미다.

윤동주가 갑작스런 귀국을 해야 했던 것은 당시의 전황과 무관치 않다. 윤동주가 릿교대학에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을 했던 1942년 봄, 미국은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다.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도를 실시한다. 윤동주는 귀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졌고, 때는 1943년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귀국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해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에 감금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4일 전인 7월 10일에 붙잡혔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왜 체포됐을까? 윤동주는 내향적이고 신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한때 많은 이들은 일본 경찰의 단속에 잘못 걸려들어 희생을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윤동주는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일제 때의 정부극비 문서들인 ‘특고월보’에 실린 일경의 취조문서에 이렇게 나와 있다.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다시 말해서 독립운동이 죄목이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중심인물은 송몽규이고 윤동주가 그에 동조했고, 이 사건으로 검사국(요즘의 검찰청)에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인’이었다는 사건의 전모와 경찰 수사 종결의 결과가 밝혀졌다.”

고희욱 씨는 당시 22세였고 당시에 교토의 제 3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음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수록된 고희욱 씨의 말. “그 사건은 송몽규 씨가 일경의 ‘요시찰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거였어요. 그 사람을 일경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걸 모르고 같이 ‘우리 민족의 장래’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나눴거든요. 나중에 보니 일경이 그걸 모조리 엿듣고 미행하고 해서 사건을 만들었더군요.”

이에 앞서 윤동주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친구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의식화 작업’을 진행했다. 동생들에게는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윤동주의 고향집에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된다. ‘16일 동주 사망, 시신 가지로 오라.’ 모진 옥살이 끝에 윤동주는 해방을 불과 6개월 여 앞두고 감옥에서 죽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자 떠난 유학의 여정에서 윤동주는 그토록 푸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강제로 투여한 생체실험 주사가 직접적인 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윤동주가 옥사했던 후쿠오카 형무소는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구치소 바로 옆으로 해변이 있다. 윤동주는 밤이면 귓가를 적시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밤새 뒤척였을 것이다. 파도소리는 시인의 순결한 영혼을 때리는 가혹한 폭음이었고, 가슴을 후벼 파는 절망의 포효였을 터이다.

지난해 계간 ‘시산맥’ 회원들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방문했다. 시인들은 후쿠오카 구치소 앞에서 윤동주 시인의 고혼을 기렸다. 광주일보 신춘문예 출신 진혜진 시인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변해 있었다. 지금은 구치소가 있고, 근처에는 시민회관과 4, 5층의 아파트가 있다. 구 형무소 담벼락 자리에 있는 니시모치 공원은 어린이 놀이터 정도로 보였다. 채수구가 있었고 그곳에서 추모제와 시 낭송을 하였다. 철망으로 가려진 채수구는 마치윤동주 시인이 갇혔던 감옥처럼 느껴졌다. 1km 앞쪽으로 펼쳐진 하까다만이라 불리는 바다만이 그때 그대로 있었다. 밤이면 고통에 찬 비명 같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저 바다가 야속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한 시대를 그렇게 아프게 살았다. 그의 삶은 우리들의 아픈 역사이자, 상흔의 기억이기도 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존재로 드리워져 있다. ‘자화상’ 속의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오늘 당신들의 삶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함께 윤동주와 연희전문에서 공부했던 후배 정병욱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이제는 북간도 용정 뒷동산에 묻힌 동주의 무덤 위에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돋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의 무덤은 멀리 북간도의 용정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주의 나라사랑, 동주의 겨레사랑을 저버린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동주의 무덤은 있는 것이다.”(정병욱의 추모기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중에서)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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