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2021년 05월 15일(토) 01:00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수치-인간과 괴물의 마음 이창일 지음
다음은 무엇에 대한 정의일까. 두 글자로 요약이 가능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윤동주),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맹자), “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바탕으로 삶으로 나아갔다”(가를 융), “수치는 필멸하는 인간이 육신에 남은 범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 바로 ‘수치’(羞恥)다. 사전적 의미의 수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을 일컫는다.

오늘의 시대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다. ‘죽은 부끄러움의 사회’이자 ‘수치 중독 사회’인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 철면피의 사회가 돼버렸다. 나는 괜찮고 너는 그르다는 내로남불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에게서 더 많이 보인다.

수치는 때로는 사람을 완성하고 때로는 사람을 파괴하는 두 얼굴의 감정이다. 수치에 중독돼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이 마비된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본 ‘수치-인간과 괴물의 마음’은 이색적인 책이다. 제목에서 보듯 수치의 속성은 인간의 마음과 괴물의 마음을 지녔다. 저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창일 박사는 수치에 대한 정체를 추적하고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종교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오늘의 사회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우리는 왜 사라진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는가?”가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사실 오늘날처럼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는 없었는데 역설적으로 부끄러움이 범람하는 시대 또한 오늘의 사회다.

윤리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다. 사람들은 규범을 상식으로 내면화하고 이에 어긋나는 행위는 심리적 규제를 가한다. 사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반응이 수치인데,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에덴 동쪽으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근원적 수치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모티브다. <추수밭 제공>
애초에 수치는 야누스와 같은 이면을 지녔다. 인간의 근원에는 감정의 지옥이 드리워져 있다고 본다. 저자는 ‘아담이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이래’ 수치는 인류 역사에서 부정적 맥락으로 사용돼 왔다고 본다. 망신살이 뻗치거나 인간관계가 파탄이 나는 상황에 접할 때 인간은 수치에 사로잡힌다. 저자는 이를 수치의 ‘아래쪽 얼굴’이라 설명한다.

반면 옛 선비들이 강조했던 염치의 개념으로 수치를 볼 수도 있다. 본회퍼가 말한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남명 조식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정약용은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는 태도인 ‘신독’(愼獨)을 재해석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매천 황현은 “국난을 당해 죽는 이 하나도 없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저자는 시인 윤동주의 부끄러움에는 순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던 윤동주가 지녔던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잃고 언어를 잃어도 시인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 그때도 시인은 많았다. 또한 교감 능력만을 사용해서 사태를 짐짓 외면하고, 수사의 기교로 돌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공감하면, 내면에 샘물이 솟듯 부끄러움이 가득 차고, 세상의 몰염치에 부끄러워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 의로움이 생겨난다.”

한편으로 자연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수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적응하면서 뇌 속에 각인된 ‘이차 감정’, ‘공감 감정’으로 본다. 공감을 토대로 하기에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공감이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다.

공감이 폐기된 사회에서 피아 구분과 자기 증명이 관심사항으로 대두됐다. 승패와 손익으로 관계를 파악하는 상황에서 무시를 당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기대를 충족지 못한 데에는 둔감해지는 게 오늘의 세태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그것이 곧 수치다.’ <추수밭·1만8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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