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삶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멧돼지를 잡기 위해 사냥견을 직접 길렀다. 정확히 말하면 강아지를 사다가 사냥견을 조련했다. 개들이 어느 정도 크면 아버지는 멧돼지 우리에 개를 집어넣었다.(아버지는 사냥견 훈련을 위해 멧돼지도 길렀다) 이때 개들은 성향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였다.

“관심 없이 딴전 피우는 놈, 멀뚱멀뚱 바라보는 놈, 뒷다리 새에 꼬리 끼우고 도망치는 놈, 다짜고짜 짖으며 달려드는 놈. 그 풍경 속에서 선친은 철없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사냥개는 사냥감을 알아보는 본능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아무 쓸모가 없다.”(‘아버지의 수업’ 중에서)

그 아들은 자라서 시인이 됐다. 삶의 다양한 풍경을 자신만의 언어로 그리는 문인이 된 것이다. 곡성 출신 윤석진 시인(60). 199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인은 등단 30년 만에 첫 시집 ‘내 시간의 풍경’을 발간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그는 그동안의 창작과 자신의 삶을 단 한권의 시집에 담아냈다.

‘왜 이제야 작품집을 발간했느냐’는 물음에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무언가(명예 또는 이름 따위 등)를 얻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치열하게 시를 쓰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과작(寡作)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성정을 미루어 알고 있는 기자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윤 시인과는 15년 전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즈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때도 그는 그냥 시가 좋아서 시를 쓰는 말 그대로 ‘시인’으로 존재했다. 비록 창작집을 내지는 않았지만 “늘 시를 생각했다”는 말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서른 살에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니 광주일보가 저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것이죠.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시세계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시를 쓸 수 없었어요.”

그는 전남대 중문과(80학번)를 졸업하고 잠시 사회생활을 했다. 신춘문예 당선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써뒀던 시를 투고한 게 계기가 됐다. 이후 좀더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전남대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학위를 받고 한때 강사로 활동하면서 창작을 했지만 발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시는 ‘인간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창작자와 독자가 인간이고, 시적 내용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시란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인간 삶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데 시가 ‘봉사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당위겠지요.”

그 때문이었을까. 이번 시집에는 철저하게 삶과 밀착된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삶은 시간이라는 추상적 흐름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늙은 귀목나무가 동구를/ 지키는 산골마을/ 곱슬머리와 부사리 눈/ 씨익 웃으면 뻐드렁니 엿보이는/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철도 들기 전에 동무들/ 황량한 세상을 향해/ 風媒花처럼 흩날릴 때는/ 귀목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중략)”

‘고향’은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 구체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형상화된 시다. 화자의 경험이 실재적이면서도 정감있게 투영돼 있다. 그러나 “이제 귀목나무도 없는/ 적막한 산골마을/ 늙은 농부 하나 살고 있습니다”처럼 지금의 고향은 쓸쓸하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번 작품에는 정치 현실과 시국,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풍자를 담은 비판적 시도 있다. ‘주어가 없다’라는 작품에서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정치인의 민낯을 볼 수 있다.

“판사 출신 국회의원인 그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모국어 짧은 문장을, 주어가 없다/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문맥을 고려할 줄 모르는/지진아 수준의 文解力을/ 언죽번죽 세상 떠들썩하게 떠벌리며/ 희대의 큰 도둑놈을 변호했다…”

또한 작품집에는 나름의 형식을 실험한 시도 있다. 시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거나(‘복사꽃’), 직접화법을 따옴표 없이 형상화한 작품(‘道’)도 눈에 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되뇌이고 묵혀 자신만의 사유와 정갈한 언어로 갈무리한 작품들은 절창에 가깝다.

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아니 “시의 생산자로서 항상 고민하는 게 독자와의 만남”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갈수록 관념화 돼 가는 오늘날의 시는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며 “이에 대한 시인들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당분간 고향 곡성 겸면을 오가며 농사일과 시를 쓸 계획이다. 고향에 노모가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데 “과일 솎기나 농약치기와 같은 일”은 거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창작에 더 신경을 쓸 예정입니다. 2년에 한번 꼴로 시집을 냈으면 하는데, 어떻게 될지 장담은 못하겠어요.(웃음) 그러나 삶이 치열할수록 완성도 높은 시가 나온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기에 좀더 창작에 열정을 쏟을 생각입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