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3>
미술, 똑같이 그리는 ‘기술’서 느낌 표현하는‘예술’로
사진 발명돼 똑같이 그릴 필요없어
인상파 이어 표현주의 화가 등장
모방 통한 ‘재현’ 회화서 벗어나
그로피우스·이텐 ‘예술교육’ 주창
2019년 10월 04일(금) 04:50
오십 중반에 일본의 미술전문대학을 겨우 마쳤지만, 나는 내가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그림을 본 친구들의 반응이 죄다 “아~” 한다. 감탄이 아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다. 내 친구 딸 중에 ‘앗! 애기다!’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다. 아기 때, 예쁘게 차려 입혀 나가면 사람들의 반응이 “앗!” 하고 다가왔다가 차마 “예쁘다!”라고 말은 못 하고 겨우 “애기다!” 하며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진실하다. 내 그림에도 꼭 그런 반응들이다. 그림의 대상과 전혀 안 비슷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화폭에 똑같이 그리는 것은 기술이다. 그림은 원래 기술이었다. ‘예술’을 뜻한 ‘art’의 어원은 라틴어 ‘ars’다. 이는 그리스어로 ‘기술’을 뜻하는 ‘techne’에서 기원한 단어다. ‘예술’은 ‘기술’에서 분화되어 나왔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면 ‘똑같이’ 그릴 수 있다. 미술시간에 한쪽 눈을 감고 연필로 대상의 크기를 가늠해가며 연습했던 ‘데생(dessin)’은 바로 이 ‘기술’의 기초 훈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림은 대상과 똑같을 필요가 없다. 사진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데생을 열심히 연마하면 나도 대상을 똑같이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캔버스에 빔 프로젝터로 대상을 비춰서 그림자대로 그리면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수 있다. 실제로 데이비드 호크니는?명화의 비밀?이란 책에서 한스 홀바인, 반 에이크와 같은 화가들의 ‘사진처럼 그려진 그림’은 당시 최고의 광학기술을 이용해 그렸음을 밝혀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만 하더라도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화가의 존재 이유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개발된 ‘원근법’ 또한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실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기법이었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된 후 화가들의 ‘기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아무리 똑같이 그려도 사진보다 똑같을 수는 없었다. 미술이 ‘기술’에서 ‘예술’로 넘어가야 할 결정적 이유가 생긴 것이다.



미술사에서 ‘인상파’가 중요한 이유

인상파들은 ‘느낌’을 그렸다. 자연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 이전의 회화는 고정된 자연을 그렸다. 그러나 인상파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포착하려 했다. ‘변화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을 공간예술인 회화에 끌어들임으로써 미술은 사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디어 회화는 모방을 통한 ‘재현’에서 벗어났다. ‘기술’에서 ‘예술’로의 전환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인상파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인상파는 철저하게 ‘개인의 느낌’, 즉 ‘인상’에 기초했다. 인상파에 이어 또 다른 혁명적 그룹이 등장한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다. ‘인상(impression)’과 ‘표현(expression)’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인상’은 수동적이지만 ‘표현’은 주체적이며 보다 적극적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일어난 내면의 적극적 표현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일컬어 ‘표현주의’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표현주의’라는 이름하의 다양한 시도는 ‘인간 내면의 발명’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근대 심리학의 형성기와 겹친다. 인간 내면의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다. 이 또한 엄청난 주제다.

인간 내면의 표현을 위해 다양한 매개물이 사용되었다. 회화만이 아니다. 사진, 영화, 연극, 음악, 건축 등 거의 모든 예술영역에서 표현주의적 시도가 일어났다. (이 글에서는 회화에 국한시켜 설명한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상파를 벗어나려는 ‘표현주의’가 시도되었지만 독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특히 ‘다리파(Die Brcke)’, ‘청기사파(Der Blaue Reither)’를 들 수 있다.

전쟁 전,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은 슈투름(Strum) 화랑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들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난 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다시 집결했다. 표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그림의 형식과 내용도 바뀌었다. 아름다움과 균형의 미학을 거부하고, 형태의 왜곡과 색채의 과장을 무기로 했던 치기 어린 표현주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의 11월 혁명으로 야기된 ‘시대정신(Zeitgeist)’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를 보다 구체화해야 했다. 내면의 반항적 표현이 아니라 내면의 적극적 ‘외화(外化 ?ußerung)’가 예술의 지향점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 바우하우스가 있다. 예술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에 기여해야 했고, 예술가는 교육되어야 했다. 따라서 예술도 교육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로피우스는 ‘예술학교’라는 구체적 형식을 만들어나갔고, 이텐은 ‘예술학교’의 교육내용을 설계했다. 바우하우스 초기, 이렇게 ‘형식’과 ‘내용’은 아주 조화롭게 맞춰졌다.

?바우하우스의 선생으로 초빙되기 전, 이텐은 빈에서 사설 미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텐에겐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물론 외모도 매력적이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술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횔첼의 제자가 되려고 슈투트가르트에 갔지만 학교에 바로 입학할 수 없었다. 대신 횔첼의 조교였던 이다 케르코비우스라는 여성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관계는 곧 역전하여 그녀는 이텐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이텐이 빈에 사설 미술학교를 열자, 그녀는 그곳으로 따라와 학생이 되었다. 이텐이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되자, 또다시 바이마르로 옮겨와 바우하우스 학생이 되었다. 바우하우스 시절에는 이텐의 관심을 얻으려고 그 앞에서 일부러 기절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당시 바우하우스에는 여학생의 숫자가 무척 많았다. 개교당시 그로피우스는 여학생 50명, 남학생 150명 정도로 시작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개교 후, 제대로 된 모집이 이뤄진 1919년 겨울학기에는 여학생이 101명, 남학생이 106명이 등록했다.)

1916년부터 3년 동안 빈에서 살면서 이텐은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을 만났다. 빈의 혁명적 건축가 아돌프 로스, 알마에 대한 집착으로 더 유명한 오스카 코코슈카, 12음계의 아르놀드 쇤베르크,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다. 주로 알마 말러의 ‘붉은 살롱’에서 만났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러한 인연으로 알마는 이텐을 그로피우스에게 소개했다.



‘문제적 인간’ 이텐, 명상법도 가르쳐

이텐은 빈에서 클림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에미 안베랑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 또한 이텐의 미술학교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클림트가 사망한 1918년, 같은 병(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텐은 이듬해 그녀의 여동생 힐데가르트 안베랑과 결혼한다. 참고로 그녀들은 당시 빈의 가장 돈 많은 가문 출신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빈으로 이사 오기 직전, 이텐의 외모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남들의 주목을 끄는 특이한 의상을 입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도 동양의 수도승처럼 완전히 밀어버렸다.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된 후에는 더욱 특별해 보이는 긴 가운을 입었다. 날카롭지만, 조각상 같은 얼굴에 빡빡 깍은 머리, 그리고 보라색, 흰색, 혹은 회색의 긴 가운을 번갈아 입었던 이텐은 사뭇 사이비종교 지도자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마즈다즈난(Mazdaznan)’이라는 신흥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마즈다즈난은 독일계 미국인 오토 하니쉬가 1890년 시카고에서 만든 신흥종교다. 조로아스터교의 일종으로 호흡법?채식?명상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료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빈 시절부터 시작된 이텐의 마즈다즈난식 생활습관은 바우하우스에서 더욱 철저해졌다. 이텐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마즈다즈난 호흡법과 명상을 교과과정의 일부로 가르쳤다. 그는 학교 농장에서 재배한 농산물로 학교식당에서 학생들과 단체로 채식을 하기도 했다.

이텐이 빈에서 바우하우스로 옮겨왔을 때, 그의 사설 미술학교 학생들도 따라왔다. 문헌에 따라 14명, 18명, 혹은 25명이라고 각기 달리 전해진다. 이래저래 그는 화제의 중심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예술교육은 기존의 미술아카데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내용을 갖고 있었다.

<광주일보와 중앙SUNDAY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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