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라도의 魂<13>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⑥ 행동하고 실천하라…다산 정약용과 호남실학
다산, 호남지식인들과 함께 ‘백성저항’ 개혁 꿈꿨다
정조 총애 받으며 관직생활
세상 부조리·모순 바꾸려 노력했지만
2019년 08월 05일(월) 04:50

많은 관광객들이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을 찾는데, 초당이 와당이 된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한다.

다산 정약용


















“官所以不明者(관소이불명자) 民工於謨身(민공어모신 (불이막범관야)”

곡산부사 정약용이 농민봉기를 일으킨 이계심을 무죄 석방하며 밝힌 판결 이유다. 해석하면 “수령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들이 제 몸 보신에만 교활해져서 폐막을 보고도 원님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정부가 잘못하면 항의해야 올바른 정치가 된다’는 의미로, ‘촛불정신’과 닿아 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이를 두고 “1960년 4·19학생혁명도, 1980년 5·18광주항쟁도, 2017년 촛불도 모두 다산이 인정한 국민저항권”이라고 평가했다.

다산은 혁명에 버금가는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新我之舊邦)”며 철저한 개혁을 강조했다.

한 발 더 나아가 ‘탕론’에서는 “잘못한 군왕은 민중의 힘으로 끌어내리고, 새로운 군왕을 옹립할 수 있다”는 폭군방벌론을 옹호했다. 왕정시대 주장이었으니, 과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강진 유배는 ‘학문하라’는 하늘의 뜻

위대한 사상가는 홀로 또는 저절로 출현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은 기본이고 주변 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다산이 살아가던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재정은 파탄났고, 궁핍해진 백성의 살림살이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주자학은 정적을 제거하는 무기로까지 타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성리학의 한계였다.

대다수 백성은 무전농민으로 전락해 계층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졌고, 사회경제적 모순은 극대화돼 봉건사회 해체 징후마저 나타났다. 여기에 서양사상의 유입이 더해져 사회는 급변했다.

봉건적 억압과 탐관오리의 과도한 착취로 살아갈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에 이른 백성들의 현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목도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눈감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았다. 그러면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학문의 본령”이라며 실학을 탐구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을 사숙하며 실학에 뜻을 뒀다. 청년기 그는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십수년 관직생활 동안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서학 탐독이 빌미가 돼 모함으로 되돌아왔고, 강진 유배로 귀결됐다.

그나마 강진 유배는 다산의 행운이었다. 외가가 지척인 해남인 까닭이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시·서·화 삼절로 유명했던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다산은 공재의 외증손자다.

다산은 친가보다 외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인 위당 정인보는 “실학풍의 학문적 영향은 물론 서화의 기예까지 외가에서 전수됐다”고 했다. 다산도 외가에 대해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대부분 외가의 혈통에서 받았다”라고 했다.

외가인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가로, 집안에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그 곳에는 1만여권의 서적이 비치돼 있어,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다산은 “이제야 내가 겨를을 얻었구나”라며 울분을 달랜 뒤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호남 재야지식인, 다산과 의기투합

학맥은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다산 정약용으로 연결된다. 다산은 성호로 대표되는 경세치용학파, 연암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 추사로 대표되는 실사구시학파의 실학 유파를 모두 수용해 자기 학문에 용해시켰다.

또 주변에는 실학적 분위기를 성숙시켜왔던 호남의 재야지식인들이 있었다. 불후의 저작들에는 항상 제자 10여명이 함께 했다. 전문 편집인들인 셈이다. 이들은 호남에서 살아가며 오랜기간 응축시킨 사고와 의지를 다산의 사상에 투영했고, 다산은 리더로서 집성해갔다.

다산은 호남에 객으로 와서 주인이던 호남의 학자·문인들과 교류하며, 그의 경륜·포부를 십분 발휘한 인물이다. 그가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호남 지식인들의 정신과 기대가 반영돼 있는 것이다. 사회 모순에 대한 호남 지식인들의 강한 비판적 성향도 다산을 자극했을 것이다.

또, 호남실학의 3대 천재로 일컫는 존재 위백규, 여암 신경준, 이재 황윤석 등은 다산에 앞서 호남실학을 꽃피운 선각자들로 다산은 이들의 업적을 체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오기 2년 전 생을 마친 존재는 70세에 이르러 정조께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6가지 정책을 건의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렸다. 앞서 65세에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를 내놨다. 그는 ‘정현신보’에서 “세력 있는 부자는 더 많이 소유하니 부유할 수록 사치하고, 가난할 수록 더욱 곤궁해지는 형세”라 비판하고 “부자에게는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세금을 제대로 걷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잡다한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자력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고 주창했다. 다산의 사상과 일맥생통한다.

다산은 조선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조선 최고의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온 세상이 썩은 지 이미 오래다.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다산의 말이다.

다산의 경세론은 조선후기 사회현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서 나온 변법적 개혁사상이다. 그 핵심은 ‘일표이서’다. 국가 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와 법규에 대해 기준이 될만한 내용을 기술한 ‘경세유표’, 목민관인 지방관리들이 부임부터 물러날 때까지 지켜야할 윤리강령이 담긴 ‘목민심서’, 죄인을 처벌할 때 유의해야 할 점과 법을 적용할 때의 마음가짐 등을 제시한 ‘흠흠신서’ 등이다.

다산의 경세학은 민본주의에서 출발한다. “‘목민심서’는 무엇인가? 지금의 법제를 그대로 추종해서 우리 백성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조목별로 고금의 자료를 찾아 망라하고 간교·허위 행위들을 낱낱이 파헤쳐 폭로한 내용을 목민관들에게 제공하면, 아마 한 명의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입게되지 않을까. 이것이 나 정약용의 마음이다.” <자찬묘지명>

노사 기정진은 상소문에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이유와 나라를 좀 먹게 하는 실제 내용이 이 책 안에 있다. 세상을 구제할 내용의 책”이라며 다산의 목민심서를 철종에게 권했다.

◇다산초당과 존재고택

다산초당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1808년 봄, 다산은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서옥이었다. 지난 7년여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 혜장스님이 있었다.

다산은 시를 지어 이 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흔쾌히 허락했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물게 된 배경이다. 다산은 이 곳에서 10년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다산은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다.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을 보자. 와당이 아닌 초당이다.

다산은 해남 윤씨의 사재인 다산초당에 정을 붙이며 살아가고자 아름답게 꾸몄다. 채마밭을 일구고, 물을 끌어다가 인공폭포를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멋지게 단장했다(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바위 절벽에는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藥泉)·다조(茶조)도 마련했다. 다조는 차를 달이는 부뚜막이다. 이를 두고 다산 4경이라 한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초당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가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혀줬다.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천일각)에 이르러서는 흑산도로 유배 간 형(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멍을 때리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다산초당은 초당이 아닌 와당이다. 1950년대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기와로 건립해 와당이 됐다. 초당을 찾는 모든 이들이 “초당이 아니네”라며 한마디씩 한다. 초의선사가 남긴 다산초당도를 근거로 다산초당을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장흥군 관산읍 존재고택은 고즈넉하다. 장흥 위씨 종가로 방촌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경치가 아름답고 고택의 운치가 더해져 여름철 시원하게 보내기에 적당한 곳이다. 서재가 매력적이다. 존재 선생이 공부하던 곳으로 아주 작고 특이한 구조다. 1700년대 지어진 정자 형태의 건물로, 앞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뒤쪽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 맞배지붕이다. 스승 윤봉구 선생이 써 준 ‘영이재(泳而齋)’와 ‘존재(存齋)’ 현판이 걸려 있어 마치 옛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집 뒤쪽에는 정원이 있어 운치가 있으며, 뒤안 가운데 지어진 안채 굴뚝은 벽을 기와로 쌓아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을 돌면 존재 선생을 기리는 옛 다산초당 자리에 다산사가 있다.

/장흥·강진=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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