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놀랍지 않은가?”

궁궐, 사대부 가문, 세책방을 가리지 않고 소설 애호가들로 넘쳐났던 18세기 대소설(장편소설)의 시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들이 향유했던 100권, 200권 규모의 대소설은 장편보다 단편이 강세를 보이는 현재 한국 문학 출판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였다.

작가 김탁환이 신작 장편 ‘대소설의 시대’를 펴냈다. 2003년 ‘방각본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 백탑파 시리즈는 ‘열하광인’, ‘열녀문의 비밀’, ‘목격자들’에 이어 ‘대소설의 시대’를 선보이며 5종 10권에 이르렀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거대한 장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가 그 긴 글을 쓰고, 베끼고, 읽었을까. 위로는 혜경궁 홍씨에서부터 아래로는 필사 궁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궁궐, 세도가, 세책방을 가리지 않고 소설을 통해 그들만의 상상력을 은밀하고 끈질기게 펼쳐나갔다.

소설은 조선 최고 이야기꾼 임두가 궁중 여인들을 위해 23년째 대소설 ‘산해인연록’을 써서 매달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있다는 내용을 모티브로 펼친다. ‘산해인연록’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임두와 그 제자들,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몇몇 공주, 필사 궁녀 성덕임밖에 모른다. 그런데 199권까지 잘 써 오던 임두가 5개월째 200권을 쓰고 있지 못하자 궁에서는 김진과 이명방을 호출해 작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을 요구한다.

소설의 목차 제목은 모두 실존하는 대소설들의 제목이다. 목차가 주는 낯섦은 그 자체로 18세기 소설이 얼마나 철저하게 망각됐는지를 보여준다. 방대한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장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민음사·1만3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