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8일은 아버지의 99세 생신이었다. 폐렴으로 세 번째 입원했다가 다행히 생신 며칠 전에 퇴원하셨다. 2남 4녀에 손자녀, 증손을 포함하여 4대, 모두 20명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증손자 세 녀석이 달려들어서 저희들 생일 때 하던 버릇으로 촛불들을 후후 불어 껐다.

1년 전부터 아버지는 휠체어 생활을 하셨다. 가까이 사는 아들딸들이 수시로 아버지를 돌봐드렸다. 낮에는 요양 보호사, 저녁부터 오전까지는 간병인이 왔다. 늦은 오후에 큰아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시내 대형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드시는 것이 아버지의 즐거운 일과였다. 왕복 1시간 반이 걸리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주치는 이마다 미소 가득,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셨다.

지난 여름에는 70대 초반인 나도 한 달 가까이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다녔다. 어느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차 속에서도 먼저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새 지역의 유명 인사셨다.

2월 마지막 금요일, 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열이 나고 다시 폐렴 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병원으로 모셔서 고생시키기보다 집에서 돌보아 드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듯 싶었으나 이미 결정한 듯했다. 동생은 미국에서 암 전문의로 지내다 퇴직하고 와서 몇 달째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다른 동생 역시 의사인데 같은 의견이었다. 병원에서 갖가지 혈관 주사와 콧줄을 달고 고생하시는 것보다 집에서 의사 아들들이 돌보아 드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지나니 아버지는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도 보시고 예전처럼 우리 손등에 수없이 입맞춤을 하는 것이 회복 중이신 것 같았다. 밖에 나가고 싶어 하셔서 그 마트에 갔다. 아이스크림을 드신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삼남매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었다. 아버지도 여느 때처럼 행복하게 웃고 계셨다.

미국에서 여동생이 열흘 만에 되돌아왔다. 내가 오후에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거실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요즈음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동생에게 “네가 와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 밤에 3대가 다시 모였다. 지난번에는 살아서 앉아 계신 아버지 둘레에, 이번에는 숨이 끊어져 누우신 아버지 주위에 작은 흐느낌만 있을 뿐, 아무도 큰 소리로 울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부모님이 생전에 웃음 가득, 서로 이마를 맞대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손녀들이 확대하여 붙였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 “하나님, 그저 감사합니다.”도 아래쪽에 보였다.

새봄이 시작되는 3월 둘째 날 하관식, 비록 차가운 땅속이지만 아버지는 7년 만에 어머니 곁에 누우셨다. 두 분은 생전에 소문난 잉꼬부부셨다.

우리 육 남매는 사흘간 거의 울지 않았다. 아버지가 천수를 누려서 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술자리 건배사에 등장하는 ‘구구팔팔 이삼사’, 즉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만 앓고 죽으면 좋겠다.’보다 더 편안하게 가셔서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육이오를 겪은 후, 예수님을 믿고 줄곧 부활 신앙으로 사셨다. 우리 역시 부모님의 신앙을 가장 큰 유산으로 받았다.

사람은 죽음을 전제로 태어난다. 대부분 잊고 살거나 생각하기 싫어하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다가 때가 되면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삶, 부활을 기대하며 편안히 잠드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한 달 여 만에 부활절을 맞았다. 어느 때보다 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