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에게 일렀다. ‘길이 보이는 한, 난 망명객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이다.’ 배낭을 추스르고서, 그는 먼 대륙을 가는 첫 걸음을 떼어 놓았다.” 소설가 복거일이 1987년 발표한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마지막 문장이다. ‘경성(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부제를 단 이 소설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대체 역사’(alternate history)를 그린다.

‘만약에(if)…’를 가정한 소설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죽지 않았다. 일제는 철저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라 조선을 통치한다.

그 결과 소설의 무대가 되는 1987년(쇼우와 62년)에 주인공 ‘그’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알고 살아간다. 하지만 차츰 사라진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도망자’가 아니라 ‘망명객’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를 찾아 길을 나선다.

1910년 대한 제국이 일제에 의해 망해 버린 후,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 역시 소설 속 ‘그’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함평 출신 일강(一江) 김철(1886~1934) 선생은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 정부에서 재무장·국무원 비서장 등을 맡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48살에 격무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강 선생 생가 터인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는 기념관과 함께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독립운동 역사관)가 같은 모습으로 재현돼 있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조국 광복을 염원한 한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와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임시 정부 회의실과 백범 김구 주석 침실 등이 재현돼 있고, 일제의 만행 도구 등도 살펴볼 수 있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다. 올해는 임시 정부뿐만 아니라 3·1운동도 100주년을 맞는 해여서 더욱 뜻이 깊은데 기념식과 함께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함평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를 들른 뒤 ‘대한민국 100년, 역사를 바꾼 10장면’(국립 광주박물관)과 같은 전시회를 찾아보는 ‘역사 나들이’도 좋을 듯싶다.

/송기동 문화2부장 song@kwangju.co.kr